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에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 (어렸을 때 꿈꾸던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바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때는 나도 모델처럼 길고 가는 몸매에 연예인 같은 얼굴을 바랐던 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어린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모습을 이상형으로 그리고 있는 동안 나는 내 모습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현재 내가 바라는 모습은 적당히 균형잡힌 체형, 건강해보이는 피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 센스있는 옷차림이 잘 융합된 모습이다. 사실 각각의 사항들도 모두 주관적인 조건들이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 있으니 (주변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 않는 이상) 나는 완벽히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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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은 내가 이미지코치로서 매력적인 모습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은 완전히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매력의 강도는 사실 그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이 좌우한다는 거다. 물론 내 모습에 대한 느낌은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지만 스스로를 매력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감이 있고 당당하다. 그러니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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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암묵적으로 괜찮은 삶에 대한 조건이 존재한다. 그 조건은 대개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삶과 그 조건들에 대한 비교가 일어난다. 안정적인 직업, 반듯한 집, 나를 지지해주는 부모님, 살가운 형제자매, 다정한 아내 혹은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 믿을 수 있는 친구, 거기에 건강과 매력적인 모습이 더해진다면 꽤 괜찮다고 여겨지는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나 또한 이런 것들이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겨우 인생의 중반기에 접어들었을 뿐이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이 조건들은 결코 평범한 기본값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안정적인 직업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집값이 천정부지인 시대에 집을 가지는 건 어떤 이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며,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계시지 않을 수도 있고, 어른이 되어서 형제자매와 연을 끊고 지낸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배우자와 다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불임률이 높아지면서 나를 포함해 아이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꽤 많아진듯 하다. 평생 헤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어릴 적 친구와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몸이 화를 내듯 강력한 신호를 보내거나 영영 주저앉게 만든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우리가 인생의 기본값을 그동안 잘 못 알고 지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어쩌면 그런 조건들을 평균이라고 믿으며 살아왔기에 맘고생이 많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노력한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자기 계발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진리처럼 여겨졌기에 그것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은 루저가 되는 것 같았다. 가능한 괜찮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런 바람을 가지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에게는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지 못하는 조건들이 존재했다. 그런 조건들을 떠올릴때마다 괜찮은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도무지 행복해지기가 어려웠다.
그 조건들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면 정말 행복해지기 어려운 걸까? 어쩌면 내가 가진 괜찮은 삶의 설정값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괜찮은 삶의 평균값으로 내 삶을 재단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행복은 조건이나 상황이 아닌 마음의 상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의 상태가 행복으로 물들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조건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삶의 조건으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되고 싶은,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기분 좋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진 사람, 건강한 음식을 즐기는 사람, 옷을 잘 입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람, 삶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
희망적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조건들을 살펴보니 이중엔 불가능한 게 없었다. (주관적인 평가니까.)
우리는 어떤 것을 목표로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목표를 이룬 뒤에는 더 큰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또 그 다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언제나 목표에 모든 초점이 가 있었던 거다.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삶의 방향이 맞다면 우리는 과정속에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을 살고 있는 거니까.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삶의 조건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대신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행복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사람이 분명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