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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 작가 Jul 17. 2023

혼자 뛰게 두질 않아

러닝크루와 사랑에 빠진 고독러너

달리다 보면 함께 호흡 맞춰 뛰는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악도 제법 크게 틀어놓고, 뛰느라 힘들 텐데 얼굴에 웃음을 숨기지 않고 같이 헛둘헛둘

흥겨운 러닝으로 하나 되어 보였습니다. 어떤 크루는 모자나 티셔츠를 맞춰 입고 달리기도 하더군요. 어떤 정체성을 같이 가져가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마흔이 넘으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소중하다 했던 사람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 만나기 일쑤였는 걸요. 그런데 무려 운동 친구라니요. 운동을 잘해야 친구에게 격이 맞겠다 생각해 주저하는 찰나, 나도 모르게 러닝 크루신청서를 작성했군요. 한겨울이던 12월 어느 일요일 저녁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습니다. 채팅이나 팬클럽 모임도 안 했던 제가 '샐리'라는 부캐로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만나러 가게 되었군요.


누가 봐도 어색하고 쭈뼛거리던 제게 겨울에 쇼트팬츠를 입고 맨살 하의를 드러낸 한 남자가 다가와주었습니다. "아그레아블 러닝 번개 오셨죠?"

"네...."

"누구? 닉넴이 뭘까요?"

"샐리라고 불러주세요."

"아. 샐리님!!! 반갑습니다."

어색한 인사, 좁혀지지 않는 거리로 서로 지하철 대합실에서 그날의 정모 인원이 모여지길 기다렸습니다. 마음속 후회는 이미 늦은 일, 통성명까지 했는데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크루 신청과 정모 신청을 무슨 배짱으로 한 건지 지난날의 나를 원망해 봐도 이미 늦은 일입니다. 이제는 그냥 두터운 얼굴을 믿고 오늘을 즐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10여 명쯤 모였을 때, 다 같이 지하철 대합실에 짐을 맡기고 경복궁 앞으로 이동해 간단한 몸풀기 체조를 합니다.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라 오가고, 지난 러닝의 부상을 걱정하는 걸로 보아 상당히 친해 보이는 그들 사이에 고독한 섬처럼 오토카니 있습니다.


페이스를 묻길래 600이라 답하고, 또 침묵 내 속으론 내가 이렇게 비사교적 인간이었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러너스에 대한 소개, 러닝 하는 코스에 대한 안내, 그리고 겨울 러닝의 주의점까지 친절히 말해주는 쫑리다 덕에 어색한 미소만 답례로 발사해 드렸죠. 그리고 그날 경복궁을 4바퀴 도는 LSD를 함께 했습니다. 약 한 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페이스로 천천히 경복궁의 야경을 보며, 겨울의 스산한 공기를 마시며 몸의 열감인지 처음 하는 행동들의 흥분감인지 몽환적인 느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그룹은 다소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혼자 달리면 더 빠르게 달리고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텐데, 이미 자신의 운동량은 다 채우고 달리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뛰는 사람(페이서)이 있고, 고라니처럼 빠르고 선수처럼 잘 달리는데 카메라로 다른 사람 뛰는 모습을 찍어주는 사람 (포토그래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조직하고 같이 뛸 사람들을 모으고 안내하는 리더들이 있고요.


페이서는 달리는 크루들에게 안전하게 길을 안내하고 페이스가 늦춰지지 않게 조정해 주는 사람입니다. 일종의 러닝 코치이자 가이드이죠. 이들은 손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있고, 크루들이 지지 않도록 다양한 음악 레퍼토리와 그에 지지 않을 고출력 목소리도 갖고 있습니다. 달리기 복잡한 길을 나설 때는 경광봉을 들기도 합니다. 아... 좀 창피하기도 할 텐데, 페이서들은 그런 거 없습니다. 효율적 길안내, 부상자가 안 생긴다면 어떤 것이든 들고뛸 사람입니다


러닝 크루는  달리기를 같이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옷 치장이 과도하거나, 과시욕이 있어서 자기 운동 역량을 광고하기 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순수하게 같이 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페이서가 외치는 '바닥조심''장애물 조심''속도유지''보행자 조심'을 아기오리처럼 따라 외칩니다. 뒤의 크루들에게까지 들리게 하기 해서요. 그리고 출근 시 퇴근 때 달리기 위한 짐들을 이고 지고 다니는 걸 마다하지 않으며, 일하고 와서 뛰는 삶을 '갓생'이라고 여깁니다. 땀내 나는 얼굴로 그렇게 환하게 잘 웃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매력 넘치는 사람들은 속도가 쳐지는 사람들이나 부상으로 참가가 드물어진 크루들에게 안부인사와 다정한 위로를 건넵니다. 시티런으로 내가 사는 도시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같이 나누고 8090세대의 음악에서 최근의 걸그룹 노래까지 떼창으로 소화해 냅니다. 지나가는 다른 크루들에게 소리 내어 '화화파이팅!'으로 인사도 건네고 플로깅(쓰레기를 주우며 하는 조깅)이나 장애인가이드(장애인 마라톤 동반러너)도 자기돈 내고 참여합니다.


배움이 있고 휴식이 있습니다. 크루들은 러너 혼자 뛰게 두질 않습니다. 고독한 러너로 내가 뛰어야 할 양만 냉큼 뛰어 집에서 다음 일을 하려는 효율주의자인 내게 크루들이 무슨 운명처럼 다가왔습니다. 오늘도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쌜리님!!'하고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 앞에 조금 기울어져 서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아마도 나는 고독한 러너를 내려놔야 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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