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으로 가지면 좋지만 가지기 어려운 활동을 하는 이유
꾸준히 하는 사람의 관성은 사람들을 감탄시킵니다. 유명스포츠스타나 연예인들의 루틴을 보자면 어느새 나도 운동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죠. 내가 본받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에게 자꾸만 활동을 지속하라고 끌어당깁니다. 일정시간에 뛰거나 쓰거나 읽는 사람들은 내 눈을 반짝거리게 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을 따라 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게도 그들과 비슷해지려는 노력의 자세를 갖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열심히 그냥 지속적으로 합니다.
내게 루틴은 달리기와 독서. 최근 들어하는 원서낭독이군요. 나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어쩜 한결같냐며 그럴 수 있는 비결을 묻지만 별다른 게 없어요. 새 출발과 멈췄다 다시 시작하는 게 힘들다는 사실을 인지해서 매일 조금이라도 하고 있을 뿐이지 도 닦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이는 게 아니랍니다. 멈추지 않고 조금이라도 해두기, 다음 날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깔짝대며' 지속하기가 비결 아닌 비결일까요. 그렇게 하다 보면 다음이 덜 힘들거든요. 그래서 저는 운동을 월화수목금토일 합니다. 어쩌다 일이 생기면 쉬는 거고 매일 합니다. 주 3회, 주 2회 정해놓고 하다 보면 결국은 한주의 말에 몰아서 하게 되고, 멈칫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완전히 멈추다 시작하려다 보면 포기 쪽으로 저울은 기울어져 버려요. 여우의 신포도처럼 어차피 나와 어울리지 않는 활동이었다는 마음으로 접어 버리죠. 그러니 그냥 해요.
달리기, 독서, 원서낭독이 활동들은 저를 강력히 끌어당기는 힘이 있답니다. 이 세 가지는 혼자 해도 되고요. 어디서건 쉽게 시작할 수 있답니다. 또 특별한 능력이 필요치 않답니다. 글을 읽으면 책을 볼 수 있고 걷는다면 뛸 수도 있으니까요. 영어책이야 중학교 졸업할 때의 수준의 책을 선정해서 읽으면 됩니다. 또 루틴까지 자리잡기에 지루한 이 활동들은 지루함을 잘 견디는 저에게 가장 적합했어요. 그리고 이걸 꾸준히 하려는 견제 장치가 필요하죠. 바로 인증을 하는 클럽에 가입하기입니다.
달리기는 크루에 가입해서 정기 러닝이나 마라톤 참여 등에 대한 정보 교환을 하고, 독서는 제가 하는 일이 독서토론 강사이니 뭐 읽고 쓰는 모임에 원하면 늘 가입하는 게 가능합니다. 원서는 제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자연스레 같이 읽고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가리는 편이며 낯가린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의외로 사람들과 좋아하는 활동을 같이 하는 사교적 인간이더라고요.
앞서 관성을 얘기했죠. 이 활동들은 누적시간이 쌓일 때 실력이 됩니다. 지난 3년 4천여 킬로를 달렸더니 절 아는 지인들이 러너라 불러주더군요. 책은 천권정도 읽었더니 리더라 불러주고요. 제가 갖고 싶은 정체성이 계속 하니 주어졌다니까요. 삶의 활력, 타인과의 교감은 덤이고요. 원서도 한 달에 3~4권은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소리를 내서 영어를 말하고 단어들을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책을 읽다 보니 원서로 꼭 읽고 싶은 욕구도 일렁이고요. 학생 때의 자극도 받아서 좋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큰 자극을 돌려주진 않습니다. 성취감을 느끼기보다는 지속할 때의 승리감을 느끼게 해주는 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마음은 바로 '평정심'입니다. 규칙적인 움직임을 불러오는 달리기와 활자를 통해 타인의 사고를 이해하는 활동은 큰 쾌락이나 자극보다는 예측가능한 만족감을 줍니다. 땀과 거친 호흡이 내가 움직였음을 알려주고, 문장사이의 행간에서 저자와의 사유를 주고받아 만족감을 채워줍니다. 원서 읽기는 카페에서 책을 꺼내 읽을 때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적 허영감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런 활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하고 나누는 교감의 정서도 삶에 만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연결과 지지의 좋은 점이야 말해서 무엇할까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 서로를 칭찬하고, 또 뒤처지지 않게 돌보는 마음이 연대의 정서 아닐까요? 게다가 코로나 시기 대면의 두려움은 온라인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해 준 듯합니다. 카카오톡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은 모임의 편의성과 함께 인간관계에서 불러올 수 있는 피로도를 낮춰 줬으니까요. 바이러스 광풍은 온라인 비대면 모임의 전성기를 불러일으켰죠. 그래서 모임의 좋은 점인 소속감과 긴장감은 가지고,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편하지 않는 상대를 접해야 하는 소모적 행사는 줄여줬습니다. 직접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놀아야만 찐 친구가 되는 피로누적인간관계를 벗어나는 게 가능해졌잖아요.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하루 3시간을 운동에 할애하기도 했답니다. 문제는 그 당시 책도 가장 많이 봤었던 때에요. 하루에 책 한 권을 파먹듯 읽었어요. 지금이야 집안일도 대충 하는 강심장 아내지만, 그때는 남편이 오기 전 종종걸음으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개어 살포시 정리해 두고 맞이했던 현모양처를 꿈꾸던 시절이었답니다. 벌건 눈으로 운동을 하고 나서 벽을 부여잡고 귀가하는 저를 PT선생님이 안쓰럽게 보더군요.
"횐님, 왜 그렇게 맨날 운동만 하시는 거예요?"
"운동을 못하니까요."
"그렇게 운동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할 일을 해치우고 싶다."
"아니 그렇게 바쁘면서 무슨 운동을 매일 해요. 매일 하면 근육도 안 붙어요. 주 3회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하면 되죠."
"하루라도 빠지면 다음날 나오기가 힘들어서요."
"아......"
생략된 말에 뭘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인생의 재미나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자학적 운동을 해서 되겠느냐는 걱정이 붙어 있었죠. 당시 누군가에게 증명하듯 운동을 하던 시기였거든요. PT쌤은 제가 운동 횟수를 줄이더라도 잠을 늘리는 게 정답이라고 했었죠. '강박'적 운동, '속박'적 활동에서 벗어나면 재미가 붙을 거라고 덧붙였고요. 당시 그 말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반발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냐? 텐션을 주는 활동에서 점점 기량이 쌓이는 게 아니냐고. 내일 또 열심히 할 거야.
그러다 보면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장치를 작동합니다. '부상'은 쉬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는 강제 휴식입니다. 건강하려고 시작한 운동에서 잦은 부상으로 아예 멈추는 시기가 곧잘 생겼습니다. 인대 파열, 햄스트링 염증, 염좌, 어깨 부상 등 재활의학과 방문이 잦아졌습니다. 병원에 가서도 빨리 낫게 해 달라며, 나는 운동을 해야 사는 사람이라고 애원의 말도 건네고요. 운동을 못하는 동안의 고통과 불안함을 해소할 수 없어 속상해하던 시기였답니다.
독서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좋은 책은 많고 내가 읽고 싶은 욕망은 넘쳐흐르고, 1일 1 모임을 진행 혹은 참여하다 보면 책상에 한주에 읽어야 할 책이 탑 쌓듯 올라 있었죠. 밤에 내일 진행할 책을 읽어 대느라 커피를 보약처럼 마시고요. 피로한 눈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블루베리를 먹고 루테인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습니다. 눈감기 싫어 눈에 좋은 보충제만 투여했죠. 어느덧 모임 중독자가 되어 있었어요. 코로나라 온라인 모임이 대다수였고, 어떤 날은 모임 하나는 스마트폰, 다른 하나는 컴퓨터로 접속해서 이어폰을 양갈래 다른 소리를 듣기도 했죠. 정신 나간 행동 맞습니다. 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부상으로 인한 신체적 피로도와 잦은 모임으로 인한 심적 피로도가 쌓일 무렵 코로나에 걸렸어요. 3차 접종을 마친 이후 남편과 다정히 투병격리했던 시간, 운동과 모임을 모두 강제 중지했습니다. 세상에 안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코로나가 별 후유증 없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운동은 1주일 만에 다시 시작했는데 되려 안되던 자세가 제개로 각이 나왔고요. 책은 내가 읽고 싶은 속도로 천천히 읽고 끼적이는 시간을 갖는 여유로운 독서로 누렸습니다.
그 이후 중독, 강박 운동에서 깔짝, 이완의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이어트가 필요하거나 바프나 마라톤 대회 참여를 준비할 때는 이른바 '힘든'운동계획도 세웁니다. 일영역에서도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쌓이면 주말에 폭식적 독서를 하기도 합니다. 빈틈없이 채우기만 했던 두 가지 활동에서 '여유'를 조금 부립니다. 한두 번 빠진다고, 계속 성장하는 게 아니어도 괜찮다고 안심하는 이완의 자세도 배웠고요. 이제 저는 '깔짝' 전문가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