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에는 야외 러닝에 대해 갈등이 생긴다. 속 시원히 젖기를 각오하고 나갈 때도 있지만(비 오는 날 두 번 나갔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안 좋아한다.). 지속적인 폭우로 길은 여기저기 미끄러지는 구간이 예측될 때는 그냥 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정 아쉬우면 트레드밀을 찾아 실내헬스클럽을 찾아 나선다. 러닝을 즐기며 꼭 야외일 필요는 없지만 밖을 뛰는 이유가 있다. 바깥을 달리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재미가 있고 또 지나는 길의 풍경을 감상하느라 품이 덜 들기도 하다. 힘들게 뛰러 나와서 힘이 덜 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아이러니.
비 오는 날의 달리기도 내켜하지 않는데, 장마철에는 더군다나 뛸 생각을 접었다. 추운 겨울 체감 영하 20도 뛰기는 비장함이라도 느끼지만, 비, 회색빛 대기는 왠지 음습한 기운이 들고 그래선지 정말 나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다만 달리기가 제법 익숙해지는 올해는 비가 와도 조금이라도 나가서 뛰어야겠다는 결심을 세워본다. 11월 JTBC마라톤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는데 쉬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는 생각이다. 구르더라도 밖이 더 낫다. 다행히 올해 장마는 아침 폭우와 침수, 범람은 없이 지나가는 추세여서 습기와의 싸움만 각오하면 된다.
아침에 주로 뛰는 길에는 매번 만나지는 사람들이 있다. 노랑 러너와 간헐적 러너이다. '노랑 러너'는 노란색을 주로 입고 뛰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성러너이다. 그는 아마도 나보다 30분 전쯤 도착해 5,6km를 뛰고 들어가는 듯하다. 그가 마지막 마무리로 스퍼트를 올리는 훈련과 추가근력으로 푸시업을 마칠 때쯤 나는 그 곁을 지난다. 최근에는 딸로 보이는 여자와 같이 뛴다. 아이들과 한 번도 같이 뛰어 보지 못한 나는 배가 아프다. 우리는 어느 날 아침 인사를 통하고 그 뒤로, “안녕하세요?”“오랜만이네요”“펀런하세요.” 정도의 인사를 나눈다.
또 자주 보는 '간헐적 러너'는 나와 비슷한 속도로 뛰며 연륜이 들어 보이는 시니어다. 싱글렛에 ‘finisher’(풀코스나 트레일 러닝에서 종주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기념품. 중도포기자가 많은 힘든 대회를 마친 사람의 표식이다)라고 써진 글씨로 보아 그는 아마도 풀코스 마라톤을 여러 번 참가해 본 듯하다. 최근 그가 내 옆에서 뛰면서 주법과 속도, 그리고 훈련방법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당연히 이런 모든 대화는 뛰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당시 5:45(1km를 주파하는 데 걸리는 시간)로 뛰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나는 호흡이 달려서 대답하기도 당혹스러웠는데 그분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러닝에 대한 분석까지 해줄 정도였다. 풀마라톤을 15회 이상 참가하신 선배님은 57세인데 앞으로 10km를 43분에 뛰려고 연습 중이라 하셨다. 존경 그 자체의 눈으로 한참을 바라봤었다. 그리고 빨리 헤어지길 바랐다.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면 뛰는 건 너무나 힘들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체적 특징이 비슷해진다. 마라토너를 상상해 보자. 한국의 딸 임춘애 선수와 최근 희귀명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 이봉주 선수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라. 러너들은 우선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피부톤이 갈색으로 그을려 있다. 외부 활동이 잦은 그들의 얼굴피부는 얇아지며 눈가와 뺨에 주름이 잡혀있다. 발은 또 어떠한가? (발을 직접 다 보지 못했지만 러너 용품에 풋크림과 좋은 양말이 꼭 팔리는 걸로 보아 틀림없을 거다) 굳은살과 티눈 등으로 발 군데군데 역경의 상처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러너들의 멋짐은 쇼트팬츠와 싱글렛을 입고 달릴 때 주로 드러난다. 팔 근육 위로 흐르는 땀방울과 쇼트팬츠 아래로 갈라지는 다리 근육(일명 말근육)을 보면 그들이 뛰어왔을 시간이 짐작된다. 주법과 스탠딩자세에서 훈련에 힘썼을 노력이 짐작된다. 몸에 좀 더 신경을 쓰는 러너들은 코어와 상체 운동도 열심히 해서 온몸의 밸런스가 정말 군침 나도록 멋지기도 하다. 아, 러닝을 한다고 해서 뱃살이 다 빠지는 게 아니다. 10 ~ 20km을 매일 빠짐없이 달려도 뒤풀이에서 술과 안주를 즐기면 살은 되려 찌기 마련이다. 그래서 매일 뛰어도 남산 만한 뱃살 러너들이 수두룩하다.
러너들은 복장에서 연륜을 알 수 있다. 되도록 검은색(땀에 젖을 때 가장 티가 안나는 옷)과 머리에서 흐르는 땀을 붙잡을 수 있는 헤드밴드와 발목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올려 신은 양말(미드라이즈 삭스), 걸려서 넘어지지 않도록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거나, 트레이닝 복 같은 경우 양말을 바지 위로 올려 신어야 한다. 또 신발은 처음에는 검은색, 흰색 그리고 일상적 러닝화(5~10만 원대)를 신다가 점점 더 화려한 색의 전문가용 러닝화(이제부터는 가격이 20 ~30만 원 육박)로 바뀌어간다. 최근 산 내 러닝화는 화려함 그 자체다. 색이 너무 화려해서 좀 더 빨리 뛰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눈에 튀는 장비를 갖춘 사람이 못 뛰는 건 왠지 장비발만 내비치는 사람 같아서 싫다.
달리는 사람은 자세와 옷태, 그리고 몸에서 연륜과 달리기에 대한 자세와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어쩌면 같은 종족이라고 서로를 느낄 수 있는데, 그들을 보며 소속감을 느낀다. 나만 오늘 아침 나온 게 아니었어. 오늘도 함께 뛰어 행복하다를 생각한다. 규칙적인 활동을 고정적으로 하는 사람의 균형감과 지속시키는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나이, 성별을 떠나서 달리는 사람들은 지나가며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 서로에 대한 응원을 보내는 마음을 가진다. 지금 당신이 숨이 얼마나 달리는지를 안다, 그리고 나도 살러 뛰러 나와 죽겠노라며 어서 목표를 하고 쉬고픈 마음뿐이노라를 전한다. 여기에 당신 정말 멋진 사람이군. 오늘도 만나다니 대단하다는 응원을 보낸다.
달리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우군들의 응원도 도착한다. 러닝기록을 저장하는 ‘런데이’에는 내가 학당에서 운영하는 과정 <달리는 여자>의 참가자들이 친구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달리는 동안 그들에게 내가 달리고 있다는 신호가 전달되고, 그들은 그런 내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블루투스이어폰으로 들리는 박수소리는 그들과의 연결감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마찬가지로 응원을 보낼 때 마지막 걸음에 힘을 줄 수 있었다는 피드백을 받고 잠시 뭉클했었다. 우리는 전국에 떨어져 있어도 같은 활동을 하며 함께 한다는 마음이다.
달리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모두 지속적으로 하는 운동은 아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들이라 뛸 수는 있지만, 무릎이 약해서 땀 흘리는 운동을 싫어해서 얼굴이 까매지거나 기미가 생길까 봐 등등의 이유로 지속하기는 힘들다 말한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운동 여부가 좌지우지되기도 하고, 부상도 쉬운 이 운동을 지속하는 우리 런족은 안다. 서로의 발걸음이 쉽지 않았음을 그리고 오늘도 뛸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응원한다. 우리 런족이 코로나에도 멸종하지 않고 지금은 더 늘고 있는 추세인 이유다. 우리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