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게는 부캐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결혼을 일찍 한 덕에 큰애가 고3이고 쌍커풀 동안인 제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면 주변인들이 놀라더군요. 그 반응이 재밌어 고사미(고3을 귀엽게 부르는 신조어)마미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아가가 220개월이라는 말까지요. 나이로 이야기 하기보다 어린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월령으로 아이를 소개하는 모습을 따라합니다.
"애가 고3입니다."
라고 말하면 으레껏 저의 은신에 대한 걱정과 아이 뒷바라지에 힘들겠다는 위로가 돌아옵니다. 이에 대한 저의 반응은 "글쎄요.저는 저대로 잘 지냅니다"랍니다. 우리애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미술입시를 치르고 있습니다. 학교다니며 내신도 신경써야 하고 다가올 겨울에는 입시스케줄중 가장 늦게 있는 실기시험까지 치러야 하니 목련꽃 필 무렵까지 합격발표를 기다리게 생겼습니다.
아이는 평일에는 주요과목 공부를 주말에는 실기학원에서 종일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2년되었어요. 아이 뒷바라지에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바쁜게 문제에요. 저는 '취미부자'거든요. 저는 뭔가에 빠지면 중독자마냥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공부를 좋아하는, 운동덕후입니다. 거기에 일도 하고 있어요. 5시 새벽기상 후, 6시 진행하는 모임 리드문발송, 7시 아침 식사차리고 러닝을 나섭니다. 책 읽고 운동하고 원서공부까지 하루 보내는 중 아이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효율적으로 재밌게 하는데 몰두하죠.
이번주 스케쥴러를 보니 한숨이 나옵니다. 고사미는 주말동안 학원에서 밥을 줄곧 사먹습니다. 점심 저녁 두끼를 그냥 밖에서 김밥이나 분식, 혹은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습니다. 그 후 아이는 월요일이면 배앓이를 합니다. 소화가 어려워 월요일은 화장실을 줄곧 들락달락합니다. 아이는 온몸으로 힘겨움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번주 가장 바쁜데 아이는 점점 기운이 빠지나 봅니다.
학기중에는 월요일 아침, 아이를 깨워 보내는 걸로 제 소임은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사미들이 다가오는 수능을 꼽기 시작하는 100일을 지나는 여름방학이 문제입니다. 아이는 학교에 가질 않으니 집에서 뒹굴고 늘어져 있고 싶어 합니다. 본업이었던 영어 수업을 진행해야는데 아이는 아프거나 기운 빠진 모습으로 졸며 방안에 처박혀 있습니다. 닫혀진 문틈 사이 에어컨 바람이 스며들 새도 없을 텐데 더위에도 버티는 모습입니다. 엄마가 운동중독이니 아이에게 운동해서 체력을 기르라는 잔소리를 얼마나 하고 싶겠습니까마는 꾹 집어 삼킵니다.
고사미는 오후에는 스터디 카페에 가서 수능 공부를 합니다. 저는 제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에 제 취미 생활을 합니다. 글을 쓰거나 작가강연, 혹은 달리기 정모에 나가곤 합니다. 저녁밥을 해놓기가 바쁘게 아이에게 빨리 먹으라 채근하고 밖을 향합니다. 아이는 그런 제게 익숙해졌는지, 아이폰 속 인스타그램 속 인물들과 같이 밥을 먹는군요.
아이들이 방학을 맞아 여유로운 아침일거라 생각했어요. 착각은 금물. 둘째는 학교를 매일갑니다. 체력증진프로그램부터 방과후 수업과 야간자울 학습까지 한국의 고등학생은 고됩니다. 더불어 이른 아침을 챙겨야하는 엄마도 분주합니다. 아이들은 아침 일곱시 아침식사를 하고 엄마는 새벽5시부터 취미생활을 합니다. 원서 독서에 낭독을 마치고 30여분 달리기를 하러 나서죠.
오전 운동과 큰 애 점심을 차려주고 나면 하루 반이 흐릅니다. 저녁에는 독서토론이 있으니 그 준비에 걸리는 시간도 잘 안배해둬야 합니다. 엄마였다 선생님이었다 하는 시간이 쏜살같이 흐릅니다. 품안의 자식들이라 했나요? 아이들은 커서 손이 많이 가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엄마로서 신경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시시때때로 자기 물건을 놓고갔다며 전화로 긴급히 빠뜨린 물건을 학교에 가져와 주길 바라거나 열이 나는 등 급하게 병원에 갈 일이 생기곤 합니다. 코로나때는 집에서 챙겨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았죠. 결국 취미 부자는 잠시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했던 것 만큼이나 저도 그 애들 일상에 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맞추곤 했죠. 뛰러 가기를 포기하고 아이들 학교로 준비물을 가지고 '뛰었습니다'. 아이들이 방학할 때는 운동을 작파하기까지 했답니다. 저는 애들 밥을 줘야하는 솥뚜껑 운전자였으니까요. 아이들 엄마로 스스로를 옭아맸던 시간들이었답니다.
운동을 한 사흘쯤 못가 욕구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짜증 섞인 말을 뱉듯이 이야기했습니다. "너네 때문에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해. 운동하고 싶어 죽을 거 같아"했더니 아이들이 "그럼 그냥 가서 하세요. 우리 밥은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라고 답하더군요. 아이들은 그러면서 한마디 보탰습니다. "엄마도 엄마 하고 싶은 걸 해요. 괜찮아요." 그날 저의 취미부자캐릭터가 살아나게 되었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집안의 코어인 엄마가 건강하고 그래야 가족의 일상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고사미마미는 오늘도 달리기와 독서토론을 합니다. 취미이지만 이제는 ‘00이 엄마’보다 ‘샐리’나 ‘선생님’으로 사는 시간동안 엄마로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충전합니다. 취미 생활이 일상을 뒷받침해주고, 행복한 엄마를 일으킵니다. 나는 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