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라톤'이 클리셰가 되지 않길

by 달리는 작가


남들 다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갖고 싶다. 마라톤을 뛰는데 잘 뛰는 게 아니라 성실하게 잘했다는 만족감으로 충만하고 싶다. 마라톤 대회가 3일 후다. 실력은 제자리인데 눈치 없는 심장만 벌렁댄다. 한겨울 추위에도 3개월 동안 꾸준히 준비했는데, 대회가 임박하자 공연히 성적에 대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차라리 어딘가 부상이면 성적 부진에 대한 핑계가 될 텐데, 불안하니 바빠도 쉬지 않고 운동량만 늘리던 차다. 성실한 나를 믿으면 되는데 나는 왜 돌아서서 부진한 나만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이게 다 준비하지 않은 채 지난해 서울마라톤을 쓰윽 나가보겠다 방만했던 탓이다. 지난해 동아마라톤을 중간에 그만두고 지하철로 귀가했던 아픈 기억 탓에 지나간 옛사랑을 떠올리듯 가슴이 뛰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대회 기록으로 리벤지하고 화려하게 러너샐리로 부활하겠다는 목표로 3달간 연습했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


나는 왜 뛰기 시작했을까? 처음 나는 다이어트에 가장 좋은 운동이 러닝이란 추천에 살 빼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 비비며 밖으로 뛰쳐나가 새벽을 혼자 맞는 기분은 근사했다. 그렇게 비가 오건 눈이 오건 365일에 350일을 뛰었다. 아이 임신 출산을 지나온 뒤 하체 비만의 내 몸은 늘 비만과 고도비만 사이에 있었으나 공복유산소로 러닝을 꾸준히 한 뒤 내 다리에는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러너의 근육이 생겼다. 이후로도 계속 살을 뺄 이유로 러닝을 지속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아침에 나 홀로 있는 시간을 누렸다. 블루투스 이어폰 하나면 세상의 소음과도 단절할 수 있었고, 코로나 19 기간 두 아이들이 집에서 학교와 학원 생활을 온라인으로 하는 동안 절대적으로 나를 고립시킬 기회로 삼았다. 달리는 동안은 아무 말이 없는 세계에서 나만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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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어디서건 ‘나는 러닝을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흔 넘어 시작한 운동을 동네방네 소문내며 프로선수가 된 것인 양 떠들고 다녔다. 때로 주위의 사람들은 ‘대단해’와 ‘우리 나이에 너무 무리하면 안 돼’라며 부러움과 우려를 동시에 내비쳤다. 2년을 수행하듯 혼자 달리고, 이후 풀코스를 혼자 연습해서 완주했던 2023년 가을, 나는 이제 러닝 하는 게 너무 좋아 나머지 인생기간 계속 달리는 사람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나는 장래희망으로 마라톤 하는 할머니를 꼭 든다. 12년 남은 환갑 때는 세계 8대 마라톤을 완주하겠다는 목표도 세워뒀다. 계속해서 운동하는 사람으로 사는 나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채워졌다. 그런데 정작 대회에 임박해서는 마음이 산만하다. 왜일까?


하얗게 불태운 1월이 지나고, 정작 대회가 목전으로 다가온 2월로 들어섰지만 내 페이스는 목표한 대로 오르지 않았다. 달리기보다 일을 우선시한 탓이기도 했다. 2월 한 달 인터벌과 파틀렛 같은 고강도 러닝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뛴 만큼 잘 쉬는 걸 못했다. 불안증은 나 스스로를 못살게 괴롭혔고 다리의 묵직한 피로도가 계속 누적되어 말 그대로 퍼졌다. 1월 동안 누구보다 성실했던 내가 대회를 목전에 둔 2월에는 스스로를 방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3월이 되어 대회 기념 굿즈들이 배송되고, 대회를 중도 포기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임박했다. 나는 3년 전부터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첫 대회에서 4시간 28분을 장대비 속에 홀로 완주, 지난 대회에서도 4시간 24분 다시 홀로 완주했다. 나는 내 몸과 움직임에 집중했던 그 시간의 면면을 기억한다. 나는 혼자 있고 싶어 뛰는 사람이었다. 군중 속에서 같은 행위를 하지만 다 다른 이유로 주로에 서서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그 중 한 사람인 게 좋았다. 경기중 힘들어하며 토하거나 너무 지쳐 포기하기 직전의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응원과 대회 참여 러너들을 위해 함께 주로 옆 보행도로를 가득 메운 크루원들과 자원봉사자, 시각장애인 러너와 같은 거리를 함께 달리고 있는 가이드 러너까지, 각자만의 이야기를 품고 5시간여 모든 러너들이 42.195km의 주행을 마치기를 염원하는 에너지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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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마라톤 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라는 낙관적인 결과가 나왔으면 싶다. 대회 당일 아침까지도 긴장되었던 마음은 대회가 끝나니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난해보다 더 느린 페이스기록이 남았던 탓이다. 그래도 충만하게 대회를 누렸다. 그렇다. 어떤 인물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나 열심히 살다 보니 한 인물이 되었듯이 러닝 대회 당일은 그간 다량의 연습을 지속해 온 나를 믿고 가는 거다. 살아가며 만나는 고행 같은 오르막길과 긴 거리를 달려온 사람이 느끼는 온몸으로 퍼지는 콜라의 짜릿한 단맛, 힘들고 지쳐도 대회 완주만을 바라며 앞을 향해 묵묵히 달려 나가는 사람들, 러닝 대회 면면에는 우리 인생의 삼라만상이 다 있다. 결국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장거리 호흡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마라톤이 고통과 행복, 노력과 성과를 품고 있는 인생의 과정이기도 하다. 시간이 한 방향이듯 마라톤도 finish line의 골인 지점을 향해 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결국 마라톤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나는 오늘 하루만을 위해 산 게 아니라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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