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앞당겨 맞이한 것은 여름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제프 구델의 『폭염살인』은 대폭염시대를 실증하는 르포르타주다. 기록적인 폭염이었던 이번 여름은 처서가 오는데도 아직도 저물 기미가 없다. 9월에 들어서도 대낮 온도는 연일 33도, 폭염주의보가 내리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다. 그나마 이번 여름의 더위는 앞으로 다가올 더위보다 조금 나은 거라는 웃픈 위안으로 위로한다. 한국은 사계절 변화가 뚜렷하고 물 맑은 동쪽의 아름다운 나라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있다. 그런데 러닝을 하는 사람들의 인증을 보면 우리는 아무래도 이런 극한의 날씨도 이겨내는 ‘의지의 한국인’인가 보다.
아침에도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지금 우리나라는 의지의 화산을 활활 태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번 폭염 열기에 자신의 의지를 태워 덧붙인 게 분명하다. 그중 일원이 되고 싶지만 왠지 전날 밤 수면의 질이 좋지 않거나, 아침에 수험생을 챙기느라 더 신경을 쓰고 싶은 날이면 새벽 운동을 패스하고 싶어진다. 나로서는 절충안이지만 타협했다는 비굴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돌아서면 패배감에 시무룩해지기도 한다. 특히 나이키 런 앱에서 친구 맺어놓은 이들의 기록이 쭉쭉 올라가고 있는 걸 보면 새가슴이 더욱 좁아진다.
그리하여 운동을 안 할 이유 열 가지를 이겨내고 그날의 목표를 해내고 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 감정은 승리감인데, 이카루스처럼 태양을 이겨보겠노라 결심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날개가 녹아내려 추락하게 되는지도 모르고 나는 욕망을 표출한 그처럼 어쩌면 나도 뭔가에 승부를 걸었던 게 아닐까? 헉헉대면서 가뿐 숨을 들었나 내쉬기도 한다. 숨소리를 내쉬었을 뿐인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시끄럽게 들리는가 보다. 이럴 때 안내문을 써서 이마에 붙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주변에서 이렇게 거센 숨을 쉬는 사람을 본다면 저와 비슷한 이유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숨결이 거칠어진 것이니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라 말하고 싶다. 거친 숨을 내쉬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거칠게 살고 있는 게다.
8월 아침의 해는 좀 잔인하다. 달리기를 시작하면 체온이 5도 이상 오르는데, 쉴 새 없이 땀을 내며 뛰다 보면 이글거리는 태양빛으로 땀이 식을 사이란 전혀 없다. 아침 6시 전에 운동을 마치는 게 좋은데 밤 사이 깼다 잤다 하는 폭염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새벽피로가 가실 날이 적었다. 사춘기 시작하는 가시나처럼 완경의 초입에 있는 사람의 속내는 더 답답하다. 그러다 보니 해가 쨍한 7시.. 이제는 나갔으니 그냥 되는대로 운동을 빨리 마치는 수밖에 없다. 온몸의 땀구멍이 열리고 수분이 비 오듯 배출되기 시작한다. 결국 운동을 마칠 때쯤 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에 걸친 헝겊은 속옷에 이르기까지 다 젖어야 끝이 난다.
아침저녁으로 조금 선선해지기를 기다리며 견디지만 처서가 왔는데도 여전히 덥다. 지난여름을 치열하게 달렸던 러너들에게는 ‘처서매직’이 발휘될 거란 주문이 들려야 할 때다. 심박이 오르는 무더위에도 자신만의 훈련을 지속해 왔던 사람들에게 가을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훈련의 성과가 보이기 시작할 거란 약속의 시간이 다가온 거다. 무겁게 들어 올렸던 다리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자신의 페이스의 성장세를 보여줄 때란 말이 되기도 한다. 올해의 처서는 윤년이라 말이 안 되는 건지 훈련을 계속해왔던 러너들도 지쳐 나가게 했다.
그렇다면 가을 마라톤 준비를 위해 마일리지를 채워야 하는 러너들은 어떻게 준비하는 걸까? 최근 러닝 관련 게시물을 블로그, 인스타에 게시했더니 연일 뛰었노라! 남산 6km 둘레 길을 3회전 했노라! 등의 피드가 따라붙는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런 날씨에도 운동을 완수한 걸까? 트레드의 한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더위는 상황, 운동으로 인한 발열은 결과, 그리고 밖을 향하도록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의지라 했다. 그리고 상황과 결과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의지이니 이것을 세워 운동을 지속할 것을 주문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 무릎을 탁 쳤다. 뭉클해서 눈물도 찔끔 났다. 무더위도, 그 상황에서 달린 후 몸에 열감이 돌고 숨이 턱까지 받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내가 그걸 하는 쪽으로 결정하는 마음의 향방은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의지이고 하고 러너로서의 본성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를 러너라 소개하지만 기록이 대단한 사람은 아닌 내게 무더위 속 훈련은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일 또 나가서 운동하게 만드는 자원이기도 했다. 돈이 생기지도 않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열심히 목표세운 운동을 해내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내 마음의 표현인 거다.
여기에 하나 더 사족처럼 붙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준비는 했으나 여러 사연으로 운동을 못했다고 해도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말자. 실내 운동으로 대체하거나 또 지금의 운동하려는 마음이 꺾이는 상황이 실패라 받아들이지 말자. 나는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았음을 인정해 주자. 그리고 대체해서 조금의 운동이라도 이어가는 사람으로 살자.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또 조정할 수도 없는 상황과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자. 나의 의지에 대한 성적으로 스스로를 평하자.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생각하자. 나의 경쟁자는 오늘도 대단한 거리를 이겨낸 '의지 활활 러너'나 '기록이 우수한 러너'가 아니라 어제의 나임을 잊지 말자.
맹위를 떨쳤던 무더위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리워질 겨울이 올 거다. 이번 여름 훈련을 성실한 땀방울로 흘린 사람들은 겨울에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홀홀 날아다닐 테다. 그리고 가을과 이어질 내년 봄의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을 거다. 하나 오늘 내가 주춤하거나 훈련에 조금 미진했다고 해서 내일의 나의 시도가 쓸모없을 거라 미리 단정하지도 말자. 내일은 또 새로운 내가 다음의 레이스를 준비해야 할 때다. 우리의 인생은 스틸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처럼 흐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는 늘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