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엇! 자아 솟구멍이 다시 열리도록

by 달리는 작가

새천년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니 독신주의를 버려도 되겠다 믿은 나는 어리석었다.

세기말 사랑을 버리고 21세기 새로 사귄 사람이 날 아낀다 믿고 그 결과로 결혼에 골인했다. 2002 월드컵 붉은 악마티를 같이 맞춰 입고 내뱉는 응원구호에 취했을까 서로 합이 잘 맞는다 생각했고 나한테 맞춰 자신의 출퇴근시간 조절하는 것도 좋았다. 단 그게 자기 여자로 만들기 위한 포섭이란 걸 깨달았을 땐 이미 결혼도 복중 태아도 되돌릴 수 없게 커버린 뒤였다.


스무 살 중반에 결혼, 출산을 모두 마친 데는 내 성격도 한몫했다. 나는 숙제처럼 받아둔 일이 내 욕구에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부모님과 학교, 입사한 회사에서까지 늘 모범성과 친절함을 달고 살았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하고 싶다'의 추구보다 '해야 한다'의 속박에서 해방될 때 더 편안한 사람었다. 남편은 자신과 자기 사람을 조정하고 지배하는 사람이었으니 우리는 천생연분이었다. 내가 나의 숨은 욕구를 자각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우린 잘 맞는 커플이었다.

2살 터울 아이 둘을 낳아 그 아이들이 분리독립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나는 큰아이가 열 살이 되는 때를 기점으로 삼았다. 결혼 후 이년만에 아이를 놓고 다시 이 년 뒤 둘째를 만났으니 계획대로라면 마흔 살에는 다시 사회생활도 하고 육아에서도 벗어나리라 상상했었다. 21세기 아이들을 20세기 교육방식으로 19세기 문화에서 키우게 될 줄은 꿈에 모르는 채 자만했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아이 친구엄마들은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육아방식만은 꽤 비슷하다 여겼다. 나와 우리의 애들을 안전하게 잘 키우기가 우리의 과제였다. 우리는 대개 아이들 초등학교에서 5분~15분 거리에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교통질서가 정착되고 더 안전한 거리인데도 등교배웅과 하교마중을 함께 했다. 나는 어릴 때 회수권 내고 버스를 홀로 30분도 넘게 타고 국민학교를 혼자 다녔는데(나는 광주사람인데, 지역 내 3개 있는 사립학교를 다녔다. 무려 제비 뽑기를 잘해서) 25년 뒤 우리 아이들을 데리러 다닌 걸까,


작은애가 초등2학년이 되도록 그걸 계속했다. 우리 애만 부모가 케어하지 않는 애로 둘 순 없어서 애도 나도 뭐 하는지도 모르고 손잡고 오가며 걸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아이반엄마들, 같이 학원을 보내며 교감했던 사람들과 커피담소, 대형마트 쇼핑을 함께 다니느라 아이가 학교 간 새도 ㅇㅇ엄마로만 지냈었다. 결국 막내가 10살 넘었고 나는 그제야 나를 돌아볼 여유가 좀 더 생겼다.

아이가 혼자 학교에 가고 나도 내 공부를 시작하며 내 이름을 다시 찾아온 게다.


아이교육에 보탬이 시작한 독서토론교육이었지만 적어도 책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사람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기도 아이를 뺀 내 삶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남편은 아이들 친구엄마들과 지내는 나에게 '머시 중한지 모르고 아줌마들이 시끄럽다'했고 책 본다고 날 새우는 나는 '하다 하다 별짓'을 다한다 했다. 훗날 러닝크루와 주말 마라톤에 나가는 나를 보며 '바람난 여편네'라 여기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나는 점점 더 자기 좋아하는 거 하느라 집안 살림을 등한시하는 여자다. 고분고분 자기 말을 들어주더니 다른 집 엄마들과 어울려 다니다 이제는 혼자 지방대회도 다녀오는 걸 보더니 그간 자신이 알았던 여자가 아닌 듯하다 했다. 최근에는 니 맘대로 해. 다음에 뭐 할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해외마라톤 나가는 걸 모른다. 알면 기절할지도 )


나는 그가 이렇게 놀라는 거 말고는 몇십 년 만에 인생이 즐겁다. 코와 목구멍에 피냄새나도록 러닝 훈련을 해도 발톱이 번갈아 빠져 가며 풀코스를 완주하더래도 밖을 나가야 숨이 트인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도 스스로 진 빠지게 운동하는 걸 좋아하다니 나도 모르는 내가 자꾸 튀어나온다. 부모님이 아끼던 남편이 사랑하던 딸과 여자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스스로 찾는 사람으로 사는 맛에 나는 오늘도 심박을 높여본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 하도록 태어나고 있다. 숨골 열리는 탄생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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