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도 괜찮아. 하위권의 삶도 즐기면 되니까.
지금 봐봐. 완전 할머니가 치는 것 같잖아!
테니스 레슨 2년. 그리고 1년의 공백 후 다시 시작한 테니스 레슨. 지난 2년 동안은 테니스에 재미를 붙여주려는 선생님의 노력과, 실내 하프 코트라는 점들로 크게 혼나지 않고 우쭈쭈받으며 즐테행테(즐거운 테니스, 행복한 테니스)의 레슨을 받아왔다. 그러다보니 지인들과 치는 게임을 나가면, 늘 너무 못쳐서 한 포인트 끝날 때마다 서로 나에게 잘못된 점을 알려주기 바빴다. 공을 칠 때 스프린트하는 법, 팔을 휘두르는 법, 임팩트 때 공을 보는 법 등등.. 뭐 하나를 따라하면 다른 하나가 안되고, 공이 오면 'YOU' 만 외치다보니 슬슬 내가 뭐하는건가 싶고 재미가 없어졌다. 여기저기 가르침을 받아도 곧잘 따라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자괴감을 느끼며 결국 1년간 테니스를 접었다.
테니스 초보자들이 늘 겪는 슬럼프 구간. 1~2년 안에 실력이 늘지 않으면 대부분 그만둔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실력이 없으면 게임에서 위축되고, 그러다보니 게임을 더 못나가고, 새로운 동호회나 클럽에는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칠 기회가 줄고 재미가 없어진다. 나도 그 중에 하나인가 싶었는데, 회사에 같이 테니스를 치는 분들이 이런 나를 놓치 않고 계속 권유해준 덕에 1년만에 레슨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회사 동료가 받는 새로운 곳에서 레슨을 시작했다. 2곳의 레슨장에서 1년간 총 5명의 코치분에게 레슨을 받았는데 이상하게 코치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다. 여러 코치분들께 레슨을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코치마다 레슨 방식이 다르다. 라켓쥐는 법부터 다시 배운적도 있었다. 레슨을 받아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고 느낀 나에게 귀가 쫑긋한 정보가 들렸다.
내가 이 코치님 만나고 진짜 실력이 확 늘었다니까.
그래서 대회도 나가보려고.
오, 그런 코치님이라면 나같은 테니스바보도 회생이 가능할까? 6명의 코치님도 해결해주지 못한 나의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2~3년간 늘지 않는 내 자신에게 오기도 생기고 왠지 이 코치님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희망과 기대를 갖고 집에서 차로 40분 거리지만 과감히 레슨을 등록했다.
나도 이제 테니스 잘 치고 싶어!!
레슨 첫날. 선생님은 나의 실력을 보기 위해 이러저러한 공들을 던지시고는 레슨을 얼마나 받았냐고 물었다. 차마 2~3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어 2년정도라고 했는데 코치님은 화들짝 놀랐다. 놀라는 선생님에게 더 놀란 나는 '레슨을 꾸준히 받은건 아니라서요...'.라는 변명을 해댔다.
난 이미 시작부터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레슨에서 이어지는 지적은 바로 옷차림. 테니스 선수들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면 여자들의 테니스 옷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바람을 가르며 흩날리는 옷자락들이 테니스라는 스포츠를 더욱 매력있게 만들어 준다. 그럼에도 난 늘 트레이닝복을 입고 쳤다. 테니스도 못치는데 옷을 예쁘게 입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헬스장 갈 때 입는 옷으로 테니스를 쳐왔다. 그래서 레슨을 받을 때도 면티에 트레이닝바지를 입고 갔는데 코치님은 불같이 화를 냈다.
테니스는 옷을 예쁘게 입는 것도 중요한거야!
모자달린 옷도 싫고, 검은색 양말도 싫어하시고, 치마가 유독 긴것도 싫다하셨다. 코치님에게 잘보이려고 예쁜 옷을 입으려던건 아닌데, 매번 레슨을 시작하기 전에 지적부터 받으니 그게 싫어서 옷을 사게 됐다. 평소 옷을 잘입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옷이 별로라는 말을 막상 들으니 멘탈이 흔들렸다. 옷을 잘입지 않고선 테니스를 잘 배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 저렇게 싫다는데 옷을 사서 입자'
레슨을 시작하기 전에 복장부터 심사를 받다보니 어느샌가 하나둘 테니스 옷들을 사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입는 테니스복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테니스를 칠 때 옷을 어느정도 갖춰 입고 치는게 보였다. 옷 하나에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는게 느껴졌다. 대충입고 칠 때보다 테니스 복장을 갖춰입고 치는게 기분이 좀 더 좋아지는 것도 같았다. 테니스의 에티튜드. 복장을 갖춰입는걸 이 때 처음 배운 것 같다. 비록 기분좋게 배운 느낌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라도 알게 되서 다행이었다.
소문대로 이 코치님의 레슨은 남달랐다. 그간 내가 배우지 못했던 스텝들을 배우면서 나의 테니스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는게 느껴졌다. 공을 보고 따라가서 치는걸 전혀 못했던 나. 많은게 부족했지만 그 중에 가장 부족했던게 스텝이었다는걸 이 코치님을 통해 배웠다. 하지만 그걸 배우는 동안 내 멘탈은 계속 너덜너덜해졌다.
내 옆에서, 저분 치는거 보고 뭐가 문제인지 말해야 돼 알겠지?
내 앞 타임에 레슨하던 분을 코치님이 붙잡았다. 그리고 나에게 공을 던져주면서 치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셨다. 그때부터 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못하는걸 스스로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코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지켜보면서 '너 진짜 못치는거야' 를 증명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몇번의 공을 치고 나서 문제를 말하라는 코치님의 다그침에 억지로 몇마디 하셨는데 그 자리에서 코치님은 '완전 할머니가 치는 것 같잖아!' 라며 내가 치는 모습을 따라하셨다. 이 상황이 그렇게 민망할 수 없었다.
아니 나도 잘 치고 싶은데 안되는거지, 내가 일부러 안치는게 아닌데 ...
사람인 이상, 다 잘할 수 없고 못할 수도 있다는건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나에게 뭔가의 심리적 결핍이 있어 내가 뭔가를 잘 못하는걸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성격인데, 이 당시 테니스가 이런 내 심리적 상태를 가장 크게 자극했다. 그런 와중에 이 코치님은 못하는건 정확하고 타격감있게 지적하고 훈련시키는 스타일이셔서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멘탈을 부여잡지 않으면 주저 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어릴적부터 승부욕도 있고, 못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어떤걸 하든 늘 중간 이상을 해왔던 나(못할것 같은건 시도조차 안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았을까를 테니스 레슨을 배우면서 더 크게 깨달았다. 그것은 일종의 완벽주의자의 자기방어같은거였다. 못한다는 말을 듣는게 세상에서 가장 싫었기 때문에. 그런데 테니스 레슨만 하면 난 늘 하위권에, 해도해도 늘지 않는 루저가 되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이 느낌은 이전까지의 레슨과 차원이 달랐다.
실력은 분명 느는 것 같은데, 마음이 힘든 이 레슨.. 계속 하는게 맞을까?
이 힘든 레슨을 9개월이나 버티고 버텼다. 버티고 나니 실력도 늘고 멘탈도 강해진 기분이었다. 어디서든 하위권의 삶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나쁜것만은 아님을 스스로 하위권을 버텨보며 깨달았다.
9개월 후에 레슨을 그만둔건 나의 의지라기 보다, 코치님이 더 먼 곳으로 레슨장을 옮기면서 따라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참에 그만하는게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9개월간의 테니스 에티튜드와 혹독한 멘탈 훈련까지 하고 난 지금, 테니스에 있어서 나의 위치를 명확히 하고 오히려 이 상태를 즐기기 시작했다. 못하면 어때, 계속 하면 뭐라도 되겠지.
지금은 테니스의 즐테행테를 가르쳐주셨던 나의 첫 코치님에게 다시 레슨을 받고 있다. 다시 돌아온 나에게 코치님은 많이 늘었다며 지적과 함께 칭찬도 아낌없이 주신다. 완전한 초보에서는 벗어났고 조금씩 뭐라도 나아지고 있으니 테니스를 치는게 지금은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