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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Oct 30. 2021

고통을 직면하는 지극한 사랑을 결심하게 하는

한강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에서 한강의 신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진즉 알고 있었고 그것이 제주 4.3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즈음 찾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거침없이 문학동네 부스에서 이 책을 집어 들고 오는 데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한강의 글을 감당할 수 있는 날씨, 감당할 수 있는 기분,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가 아니고서는 펼쳐 들면 안 된다고 마음이 계속 경고했다. 날 좋은 날 좋은 곳에 갈 때, 혹은 갑자기 그런 순간을 맞을까 싶어 표지조차 넘겨보지 않은 새 책을 여기저기 잘도 싣고 다녔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어내지 않음으로 끝내 <작별하지 않는다>와 작별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한강의 작품에서는 죽음과 작별의 냄새가 짙게 깔려있다. 늘 두렵다. 책을 사두고도 펼치기가 두렵다. 읽으면서도 뒷 장을 넘기기가 두렵다. 문장을 따라가다가도 다음 문장에 다가가기를 주저하게 된다. 전작 <채식주의자>, <흰>, <작별> 그리고 <소년이 온다>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늘 고통스럽다 느끼는 중에도 그의 새 책이 나오면 읽지 않을 수가 없는 까닭은, 그의 작품들에는 늘 제대로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늘 제대로 살고 싶어 자신에게 인간 존재의 유해함의 책임을 지우는 사람 (채식주의자), 국가의 폭력 속에서 각자의 이유로 나 혼자만 사는 것을 택하지 않았던 그 수많은 개인들 (소년이 온다), 홀로 아들을 키워내고자 버티다 종내 녹아 버리는 사람 (작별), 그리고 흰 것들, 흰 사람들... 그의 작품 속 스러져가는 이들은 사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와 타인의 삶을 품으려던 이들이다. 강렬하게 '제대로' 살고자 해서 결국 삶을 이겨버리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죽고 작별할 뿐이다. 죽음의 냄새 속에서도 짙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유다.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p.17)


언뜻 오랜 친구인 두 인물 - 경하, 인선 - 이 주축을 이루는 듯 보이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몇 년간 죽음과 마지못해 동거하던 인물 경하가 어느 날 급히 걸려온 인선의 전화를 받으며 시작된다.  단지(斷指) 사고로 제주에서 급하게 육지로 이송된 인선은 키우던 새들이 죽지 않도록 '지금' 제주로 향해달라고 경하에게 부탁한다. 그날 밤 경하는 그렇게 급히 떠난 제주 중산간, 외딴 인선의 집에서 광폭하게 내리는 눈의 시간을 맞닥뜨린다. 그렇게 쌓은 내려앉은 눈이 열어낸 눈의 세계에서 산 것은 무엇이고 죽은 것은 누구인지, 죽은 것은 무엇이고 산 것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영혼의 공간이 열린다. 그곳에서 경하는 인선과 조우한다.


단단함을 품은 결속이고 결정(結晶)이나 쉽게 녹아버리고 마는, 찬 계절 냉기 속에서 탄생하지만 온기를 품은 눈과 같은 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 같은 눈 속에서.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p.86)


작가 본인과 많이 닮아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경하'는 제주에서의 그날 밤 전, 한 도시의 학살과 관련된 글을 쓰며 직접적인 폭력에 대해서, 까만 분봉들에 밀려드는 파도를 보고 어찌할 줄 모르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몇 년 간 불면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 경계 사이에 겨우 숨 붙어있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 뻔뻔스럽게 -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p.23)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물 잔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내 사적인 삶이 막 부스러지기 시작하던 지난해의 여름,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p.25)


'인선'은 영화(이자 책) <기억의 전쟁>을 지은 이길보라 감독과 닮아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 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p.33)
접시에 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는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라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105)

단지 사고로 삼 분에 한 번 손가락을 찌르지 않으면 살이 썩어 죽게 되는 인선은, 제대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 죽는다 말한다. 고통을 제대로 느끼는 것. 제대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너무도 달라 보이는 성격의 두 인물은, 결국 손가락이 잘린 스스로나, 굶고 있을 살아있는 새라던가, 이미 끝나버렸다고 우리가 믿고 싶은 역사적 사실이라던가, 학살에 죽은 혼들의 개별 목소리라던가, 무언가를 살리고 싶어 한다는 지점에서 동일하게 괴롭다. 묵묵히 나무를 깎는 것으로 괴로워할지, 부치지 못할 유서를 썼다 찢었다 하는 것으로 괴로워할지만이 다를 뿐이다. 한강이 서술하듯 인내와 체념은,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는,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너무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어 다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각자는 나만이 체념하고 슬퍼하고 쓸쓸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서로의 마음에 웅크리고 있는 불꽃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외로워할 뿐이다.


이  소설 속에도 체념하고, 세상과 얼레벌레 화해한 것 같아 보이고 그래서 텅 빈 것 같아 보이는, 그래서 다만 뒤늦게 발견되는 불꽃같은 인물 '정심'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갈라진 인선의 목소리가 정적을 그으며 건너온다.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p.288)


허깨비 같은 사람. 유령만큼 차갑고 고요한 사람. 실은 실톱을 이불 밑에 두고 누워 불편하게 자면서도 끝내 살아내는 인물. 차갑고 고요하게 몇십 년간 마음속에 불을 품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직시하며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며 살았던 인물. 넘겨지는 달력과 함께 한 장 한 장만큼의 작별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던 인물. 그만큼의 작별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깊은 밤 깊은 바다 같은 까만 사랑을 간직한 정심.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 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p.251)


세 인물의 삶을 통해 한강은 <소년이 온다>와 <작별>을 통해 종결하지 못했던 작별을, 작별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종결한다. 소년이 찾아왔을 때 입이 틀어막힌 말 없는 소년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그의 고통을 대신 전했던 한강은, 그것으로 작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한강은, 남은 자로서 작별하지 않을 의무가 있음을 이번 이야기를 통해 전한다. 그래서 읽는 동안 뜨거운 해 밑에서도 가끔씩 오한이 드는 것 같았던 이 책에서, 죽음의 한기가 가득한 이 책에서, 결국 나는 글의 마지막 순간 그어지는 불씨처럼 이것이 작가의 바람처럼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인 것을 알았다. 죽은 자들을 저 너머 찬 곳에 두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그랬을 때야 비로소 완성되는 따스함이 있음을 알리는 이야기임을 알았다.


그런 이야기와 문장을 쓰는 한강은 이제 소설가를 넘어 영매(靈媒)가 된 것일지 모르겠다. 한강은 우리가 흔히 '귀신'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고 환대해 볼을 에는 추위의 겨울 공기 같을 것 같은 그들이 겨울 공기를 뚫고 손에 닿는 생명의 입김이었음을, 사람이었음을 전한다. 제주의 4.3, 절멸을 위해 그들이 죽인 아이들. 두려운 존재인 귀신을 생명을 완성하는 혼으로서 받아들이고 이들을 보며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은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을 경험하는 인선의 모습처럼, 한강은 죽은 이의 영혼이 '살아있다'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영혼과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더욱 쉬이 작별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감히 그 시기의 제주에서 그들이 느꼈을 살이 찢기는 공포, 우리 아기를 살려달라는 말이 소리로 나오지 않을 정도의 공포, 목을 찢고 나와야 할 울부짖음이 마음을 대신 찢는 공포를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광주의 소년이 겪었던 공포, 죽어간 사람들의 고통과 남은 자들의 침묵, 침묵의 세월 속에 들어앉은 영혼의 응어리를 다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대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고, 사람이라는 존재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혹한 속에서도 서로에 입김과 온기를 나눠 서로를 그냥 얼게 두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강의 활자를 영매 삼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제주 4.3 학살과 보도연맹 학살의 희생자들이 통곡을 위로받아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끔찍한 살해의 현장에 있었던 우리도 너와 같이 뺨이 따뜻하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 억울했고 많이 아팠다고 말하기 때문에. "아니메, 아니메" 이런 작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우면서도 끝내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이 고통을 직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고통이 멈추면 인선의 손가락처럼 우리도 죽는 것이라고, 허깨비라고 말하기 때문에.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 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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