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졔 Nov 06. 2021

'착함'과 '일잘'의 함정을 서늘하게 보여주는

이혁진 장편 소설, <관리자들>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날 밤,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설레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가라 앉히며 이번에는 일을 시작하면 나를 잃지 않고 존재하길 다짐했다.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늘 필요 이상으로 내 회사인 것처럼 나를 갈아 넣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정신 똑바로 차리자는 의미에서 <직장인 A>를 읽는 것으로 코로나19만큼 무서운 '넵제가해내겠습니다병'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 1차 접종을 해두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출근 첫날 출근길에서 백신 2차 접종 삼아,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라면 묻지도 않고 사기에 사두고 아직 펼치지는 않은 이혁진 작가의 <관리자들>을 책장에서 뽑아 챙겼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출근길 얇은 옷을 겹겹이 싸 입고 방패이자 무기라도 되는 양 이 책을 옆구리에 꽂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이 내내 사뭇 비장했다.


덜컹이는 지하철, 그렇게 며칠 간의 출퇴근 길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은 후에도 한 번 씩 다시 꺼내 읽으며 부스터 샷으로 삼을만한 책이 되기 충분했다. 노동 현장, 노동 현장 안에서의 관리자부터 신참에 이르는 계급의 존재, 적극적이고 '착한' 인간과, 적당히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들, '착하기'를 거부하는 결정을 하는 다양한 인간들에 대한 관찰과 통찰이 짙게 배어 있는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내가 소설 속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되었다. 소설의 배경은 휑한 추운 겨울 공사터 한복판, 빠르게 매립 공사를 끝내야 하는 육체노동의 현장이라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지식 노동이지 결국 어깨를, 등을, 눈을, 손목을, 몸을 팔아 일하는 화이트칼라의 육체노동 현장도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에.


소설은 국도 옆으로 파 놓은 터에 관을 매립하는 공사장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소장'과 소장 밑 '한 대리'가 관리하는 공사 현장은 이미 완공일이 미뤄지고 있어 기간만큼 비용이 늘어나고 있다. '관리'를 해야 하는 소장은 애가 탄다. 소장은 자잘한 공사 대금 일부를 빼서 쓰기 위해 없는 멧돼지가 출몰했다고 핑계를 대고는 인부들의 식비 먼저 착복한다. 그리곤 먹고살 길이 절실하지만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신참 '선길'을 밤새 그 공간을 지키는 이로 세운다. 소장의 뜻에 따르는 한 대리는 거역이 무섭다. 현장의 동료 중 굴착기 기사 '현경'과 '목 씨'는 그런 선길이 안쓰럽지만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한 편 혹독한 환경에 공사 현장의 작업 반장들은 불만이 잔뜩이지만 소장은 권력의 비대칭을 이용해 누군가를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그들이 마치 자발적으로 그 모든 불만을 감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칭찬을 하며 늘 반장들의 불만을 종식하는 데 성공하곤 한다.

하지만 말을 해놓는 , 그것으로 정도라도 그렇게  보겠다는 답을 들어 놓는 것은 요긴했다. 일단 말을 뱉어 놓으면 알아서 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소장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노예를 부려  적이 없어  모르는 모양이지만 시키기만 해서는 능률이  오른다. 인간이란 뭐든 자기 스스로 움직여야, 그렇다고 착각이라도 해야 효율을 낸다. 부려 보면 안다. (p.44-45)
일 잘하는 초짜들은 정말 쓸모가 있었다. 반장이라 불러 주고 인부 몇 명 달아 주면 하나같이 이순신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일들을 했다. 신에게는 아직 다섯 명의 인부가 있사옵니다! 현장에 자기들밖에 없는 것처럼, 소장의 기대에 보답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 안달들을 했다. 소장은 그런 초짜 반장들을 정말 좋아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p.89)

현장에서 신참이던 선길도 점차 일이 손에 익으며 자기 효능감을 갖게 되고 더욱 잘하고 싶어 노력하고 성실히 일한다. 자신이 '이순신 장군'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지 자신조차 모른 채. 그러던 중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와 책임을 떠넘기고 죄책감을 덜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미명 하에, 이미 괴로운 누군가를 더 괴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미명 하에 진실을 은폐하려는 움직임들이 벌어진다. 모두의 목숨과 먹거리가 걸린 현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소장은 다시 한번 상황을 '관리'하고자 한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연약함에서 비롯된 나약함을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나약함과 욕망뿐인지.'를 묻는다. 착한 것이 무엇인지, 착함이라는 것이 정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행위가 맞는지, 단지 그 말을 핑계 삼아 내 배를 배 불리고 인정받고자 하는 나약함이나 욕망은 아닌지 묻는다.


그래, 맞다.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해 연민을 갖고 사랑하게 되는 지점은 서로의 연약함이다. 서로를 안아주고 싶게 만드는 서로의 빈틈. 하지만 인간은 한 편으로는 그 연약함을 핑계 삼아 나약한 결정들을 한다. 타인의 연약함을 돌보기보다 나의 연약함에 심취한 나머지 스스로를 웅크리고 나만을 끌어안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우리 각 개인은 거대한 구조 속에서 연약함을 핑계로 나약해지길 스스로 선택한다. 그리고 자위한다. 나는 타인을 다치게 하기 싫어 내 자아를, 나를 최대한 웅크리는 것이라고 자위한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린다. 타인에게 영향을,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착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서로의 연약함이,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경멸하게 만드는 나약함으로 전락하는 날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크고 작은 일들로 얼마나 많이 있곤 하는지, 그리고 그 나약함이 서로를 얼마나 미워하게 하는지, 외롭게 하는지를 생각하면 때로 인간의 삶이란 걸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제일 못 견디겠는 날은, 사실 그런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고 나 역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날이다. 나는 연약한 것인가 나약한 것인가?


이 질문에서 누구도 당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내면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이 불편한 지점을 잡고 쉽게 놔주지 않는다.


한 때 저 멀리 동아프리카의 빈곤한 이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소셜벤처를 창업했을 때, 주변에서 '착한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내가 연약하지만 연대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되는 것이 늘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착하지 않은데. 혹은 이들도 무언가를 하면 되는데 나를 왜 '착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지. 원하지도 않았는데 달린 꼬리표는 늘 스스로를 괴롭혔다. 내가 충분히 착한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만들었다. 이것이 오지랖은 아닌지, 이것이 어떻게 보면 나의 도덕적 우월감과 그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가치를 생각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나는 그래도 약간 나은 인간인 것은 아닐지, 나는 충분히 착한지,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고뇌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인 나 스스로에게 도취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걸까? 사실은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인 건 아닐까? 인정받고 싶었고 착하단 얘길 들으면서 함께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삼기는 것. 그게 나 아닌가? 사실 나도 결국 연약함을 가장하고 이것을 무기 삼아 타인의 연약함을 시장에 판매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는 나약한 인간인 것은 아닐까?


결론은 늘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 모독감에 이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말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선의나 공감에 대해 그러듯. 그건 별게 아니었다. 왜 부모 말, 선배 말, 상사 말 잘 듣는가? 소용이 있으니까. 그러면 뭐라도 하나 생기니까. 착하다는 건 화폐였다. 당장이든 나중이든 돌아올 뭔가를 위해 지불하는. 사람들 역시 정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부자 대우받으면 좋아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p.155)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았더라? 내가 곪는 줄도 모르고 나를 더 몰아세웠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멈춰서는 안 된다고. 소셜벤처를 폐업하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하면서 벌을 줬다. 착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을 멈추면 쉬이 빠져나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멈추면서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고 벌을 주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번 맛 들인 '착함'의 함정에서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책임감 있는 착한 직원이고 싶었다. 정확히는 '착한'이라는 말을 '일잘'이라는 말로 치환해서 칭찬을 받는 것에 허덕이며 목을 매었다. 가진 돈도 없고, 지위도 없고, 여유도 없고, 실존은 위협받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돈 대신 경험, 지위 대신 평등함에 대한 주장, 여유 대신 열정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실존을 겨우 지켜낸 듯한 마음이 들었다. 경험에 가중치를 두고 열정을 불태우며, 월급 루팡을 비난하고 일못을 고쳐야 하는 병처럼 여기며 살았다.


나 스스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내 의지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때가 있었다. 소설 속 반장들처럼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일잘'이라고, 조금만 더 버텨달라는 말에 분노가 무색하게 빠르게 화는 사그러 들었다. '그래,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 더 버텨보자고 말하자. 이렇게 조금씩 이야기할 때마다 그래도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생각했다. 그랬더니 연봉이 올랐다. '착하게' 살았더니 연봉이 올랐네. 또 열심히 일했다. 또 연봉이 올랐다. 점점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도 이제 내가 돈에 미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모든 열심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결국 '착한 사람', '일잘'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는데.


자신이 올바르고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빠르고 쉽게 걸려들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더, 소장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까지 먼저 알아서, 자기들 일처럼 챙기고 나섰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니까. 돈이나 술 담배처럼. 그래서 착하다는 것은 올가미이기도 했다. 착한 일을 할수록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까. 이것이 착한 일이라고, 이걸 하는 당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가리켜 보여 주기만 하면 모두 서슴없이 뛰어들며 올가미를 뒤집어썼다. 착한 사람들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더, 더, 더만을 외칠뿐이다. 요즘 세상에는 더 그렇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으면 뭔가 죄책감이 들고 업보를 풀어야 할 것 같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으면 그 나름대로 자신의 무지함과 빈한함을 지혜와 청빈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아니면 그렇게라도 잠시 우월감을 느끼든가. 그러니 모두 그 올가미의 맛에 빠져서는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점점 목이 죄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돈까지 얹으면 결과는 더 확실하다. 흔히 돈이 올가미라고들 생각하지만 아니다. 돈은 미끼고 그럴 때 진짜 위력을 발휘한다. 착한 일을 해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돈까지 생긴다고? 누가 안 하겠나?
(p.154)


비뚤어진 욕망을 불태우는 영역이 나 혼자뿐이었으면 다행인데, 연봉과 함께 직책을 갖게 되었다. 관리자가 되었다. 그런 경험이 생기니 열심히 하면 보상이 있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착함'의 맷집이 세지고 있었다. 연약한 이들을 나약하다고 여기며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도 듣기 좋은 허울을 씌워 나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착하게' '열심히' 버텨보도록 떠들어 댄 순간도 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열심히 하면 열심에 대한 보상이 있을 거라고, 성장을 하면 성장에 대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 보상을 누렸다고. '착하게, '열심히'하면 인정과 함께 돈도 따라올 것이라고 말로 행동으로 동료들에게 환각에 빠지는 사탕을 내밀었다. 나쁜 마음으로 그랬냐고? 아니.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는' 말, 정말 이들의 연봉이 오르고 성장하면 좋을 것이라고 믿어서 그랬다. 좋은 마음이었다. 어느 정도는 운 좋게도 나의 역량이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과 잘 맞아떨어진 부분이 있어서, 내가 예외 케이스일 것이라는 것을 못내 감지했으면서도.


하지만 믿음의 힘은 늘 위대하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모든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일을 벌였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바로 자신은 착하고 항상 착하다는 믿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양민을 칼로 총으로 베고 쏴 죽이면서도 생각했다.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오로지 선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오, 세상에 정말! (p.157)


소설의 '현경'처럼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되고 나서야 '착하기'를 멈출 수 있었다. 내가 노력하면 구조가 바뀔 것이라고 믿으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 소극적인 부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버텨내고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만큼은 버티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그널을 주는, 이 시스템을 탄탄히 받치는 부역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 다녔던 회사가 정말 안 좋은 회사냐고? 그런 관리자를 만났냐고? 아니. 전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좋은 회사에 속한다. 이 글이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한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안다. 나는 현장의 서툰 일꾼이었고, 때로는 손 빠른 노련한 일꾼이었고, 어떤 날은 반장이었으며, 한 대리였고, (다행히 거기까지는 안 갔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거기까지는' 아닌 게 맞나 의심이 들곤 하는) 소장과 같은 존재였으며 언제든 다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안다. 이건 그냥 늘 우리가 겪는 이야기이다.


새로 입사한 지금의 회사에서 나는 다시 자꾸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물리적으로 권력을 가진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소장과 같이 될 확률이 떨어지지만 내가 한 대리, 목 씨, 반장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권력이라도 다시 가지면 소장과 같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의 '소장'의 대사를 읽으며 서늘하고 스산했다. '소장'과 같은 이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라면 내가 '소장'인 것은 아닌지, 아무도 소장이 아니라면 결국 이 시스템 자체가 소장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가끔 스스로와 주어진 환경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만약 이미 내가 '소장'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다시 내가 지나치게 '착하거나' 유해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먹고사는 연약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관성에 지지 않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빠져나올 힘을 갖고 싶다. 내 연약함을 핑계로 나약함에 기반한 '착함'을 유지하는 대신, 타인의 연약함을 보듬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나의 나약함을 직시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가요, 가서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요. 아무도 시켜서도 안 되고 시켰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에요. 누구라도 이런 걸 다시 시키면 두말하지 말고, 아무리 늦었다 생각해도 빠져나와요. 그게 제일 빠른 거예요. 안 그러면 끝까지 끌려 들어갈 테니까. 지금처럼." 현경은 굳게 한 대리를 봤다. "감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래야 하고. 늘 그다음은 있고 그래야 그다음에 오는 것도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으니까." (p.176)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을 직면하는 지극한 사랑을 결심하게 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