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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Mar 06. 2022

영겸 언니, 나여 영숙이

영겸 언니, 나여 영숙이.


언니, 뭐여. 워찌케 그려. 우리 아들한티 다 들었어. 나가 이제사 들었어. 나헌티 말도 안하고 야들이 지들끼리만 언니헌티 다녀 갔담서. 아니, 야들도 나헌티 말을 말 거면 쭉 허질 말지 뭐 헐라구 이제와 말해쌌는지 몰러. 이쟈 가보도 못 허는디. 그냥 울 언니, 야물딱진 울 언니 김영겸이, 아현동 시장 통에 있는 집서 혼자서두 잘 살고 있겄지, 아적까정 야채 장사허고 있겄지, 하믄서 살믄 을매나 좋았겠나 싶어.


워쩌케 지내다 갔어? 갈 때 편안은 혔어? 나는 인저 보청기가 없으면 야들이 하는 소리가 잘 들리질 않어. 그래서 경숙이가, ‘엄마, 큰 이모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경자랑 이모한테 다녀왔어요.’ 이르케 말 허는 걸 한 번이 못 알어 들었어. 한챔을 얼 빠진 표정을 허고 경숙이 얼굴만 치다 봤어. 경숙이가 그 말을 시 너 번을 반복허구서야, 언니가 죽었구나 알어 들었어. 사실은 시 너 번까지 안 말혀도 됐는디, 두 번까지 말혔을 때 말은 알어 들었는디, 나가 들은 것이 맞는가 싶어 경숙이 얼굴만 빤히 쳐다 봤드니 경숙이가 나가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한 번을 크게 말혀더라구. “엄니, 엄니 언니 돌아가셨다고.” 그제야 언니가 죽었단 말이 나헌티 와서 콱 박히대.


보자, 나가 시방 아흔이 다 뎠고, 언니가 신미년 양 띤게, 그람 언니가 아흔 둘이였납네. 그릏네, 우리가 이제 은제 으띃게 뎌도 이상할 기 없는 나이긴 혀. 언니가 워쩐 일로 갔는지 따지는 것도 의미가 읎제. 갈라믄 이유야 수도 없을 거 같여. 나도 가끔씩 숨이 헐떡헐떡 허고, 걷는 건 애저녁에 잘 허도 못항게. 그라도 가만히 앉아 있음 답답항게, 마루이 앉아 찬찬히 신발 신고 나가 볼려도 쉽지가 않드라고. 요 늠의 다리가 말을 안 들으니 자빠져 죽어도 이상할 게 읎다, 싶어. 울 엄니가 농사 짓다 논밭이 고개 처박고는 그렇게 갔잖여. 그때는 희언한 죽음도 다 있다 생각혔는디, 그 때 울 엄니 몸이 이랬을까 싶어. 언니는 나브담 나이가 많응게 나브담 더하믄 더했지 덜하진 않었을랑가. 근디 괜히 언니는 나보담 건강하게 있다 갔을 것 같여. 우리 언니는 그런 사람잉게. 딴딴하고 멋진 사람인게.


언니가 그런 사람이라, 나나 언니나 살만큼 살았대두, 사럼이 태어나믄 죽는 거야 당연허대두, 그랴도 언니, 오늘은 나가 언니 혼자 먼 길 떠나불딴 소식에 맘이, 여 심장 께가 콕콕 쑤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구 우리가 못 본 지도 오래 됐응게, 엉엉 울믄, 애들이 나헌티 남사시립다고 욕헐까봐 엉엉 울진 못혀두, 아니믄 애시당초 야들이 나가 나이 먹구 남사시럽게 울까봐 얘기를 안 혔나 싶어서, 야들 놀래지 말라구 ‘그럴 수도 있지. 죽을 때도 됐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혔어두. 언니, 언니가 죽었단디 내가 으째 안 슬프겄어. 왜 엉엉 안 울고 싶겄어. 나이가 먹어도 마음도 하나요, 생각도 같은디. 나이야 이래도 다 같은디. 기력이야 쇠혀두, 그리움은 더한디. 아부지도 돌아가시고 엄니도 돌아가시고, 가족들 떠나 보내는 걸 해봤어두, 이제 가족이라하믄 딸이나 아들이나 손주들이 더 먼저 떠올라도. 언니, 언니가 죽었다는디 내가 워치케 맘이 아무렇지 않겄어.

우리 어렸을 때 같이 멱도 감고, 아부지 술 심부름도 가고, 엄니 농사 짓는 거 도와준다고 같이 잡초도 뽑고 혔는디. 언니가 날 많이 이뻐했는디. 언니 어디 가믄, 우리 막내 혼자 두고 어찌케 가겠냠서 으디 갈 때마다 날 델구 다니길 그릏게 잘 델구 다녔는디. 그람서도 나헌티 ‘우리 집 막내, 우리 집 애기, 느는 더 좋은 디 가야 헌다.’ 버릇처럼 말혔잖여. 기억혀? 언니는 소학교도 못 갔음서 니는 꼭 핵겨 댕겨야 헌다고, 아부지한티 영숙이 학교 보내야 헌다고 말혔다가 아부지가 잔뜩 씅이 낫잖여. 그 때 영숙이 학교 보내야 쓴다고 말하던 언니 얼굴이 이쟈는 잘 생각이 안 나서, 우리 여수같이 똘똘한 손주 딸들 얼굴 봄 서 ‘아이구, 그 때 울 언니가 쟈만 혔지, 생각혀보면 언니도 그때 애였지.’ 가끔 그런 생각을 혀. 결국 나도 학교는 가보도 못 혔어도, 나는 그런 언니땜시 내가 귀헌 사럼인걸 알었어.


육이오가 나 열 여덟 땐가? 우리 집이 너무 산 속 깡촌이라 언니도 나도 전쟁이 난 줄도 몰랐잖여. 소문으로만 전쟁이 났다고 듣다가, 우리도 피난 길 가야하나 언니랑 걱정허구 얘기두 허다가, 여름인가 옆 동네 노근리에 빨갱이들이 잔뜩 내려 와서 미군 코쟁이들이 죄다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가, 그게 빨갱이가 아니라는 소문도 같이 돌다가 혔잖여. 그 중 어느 밤인가 엄니가 춥다구 고쿠락에 불 좀 더 떼라고 혀서 내가 부섴으로 혼자 갔는디, 깨 마른 인민군 하나가 배 고프다고 먹을 것 좀 읃어 먹겠다구 몰래 부섴에 숨어 들어왔던 거 기억혀? 내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만 있는디, 언니가 영숙이 혼자 불 떼다가 불젓갈에 데이기라도 하믄 워쩌카냠서 따라 나왔잖여. 나 따라 나와선 그 인민군이랑 눈이 딱 마주치니께, 그 인민군이 언니헌티 배고프다고, 먹을 걸 달라고 혔잖여. 언니 나는 그때 우리가 아주 죽는 줄 알었어. 근디 언니가 그 인민군더러 기댕겨 보라드니 달달 떠는 나를 뒤로 물리고, 그 인민군헌티 낮에 부쳐 보자기로 덮어 놓은 부치미랑 저본을 건네줬잖여. 나는 언니 품에 반 쯤 안겨 서서, 무섭기는 여전히 무서우믄서도, 그때야 그 인민군 얼굴을 제대로 쳐다 봤어. 허겁지겁 부치미를 먹는 인민군헌티 그제야 앳된 애기 얼굴이 보였어. 언니는 나헌테만 언니같은 사럼이 아니었다. 언니는 그런 사럼이었어. 그런 울 언니 마지막 가는 디 꽃 하나 못 놔준 것이 내가 맘이 한이 도ㅑ.


언니가 나를 그릏게 이뻐했는디, 전쟁 끝나고 갑자기 돈 벌러 간담서 나를 홀랑 버리고 서울로 가버려서 을매나 서운혔나 몰러. 언니가 언제 나를 예뻐 했나 싶게 뒤도 안 보구. 서울만 갔어? 서울 가드니 뭣이 그리 급혔는지 잘 알아보도 않고, 이북에서 장가도 갔었고 딸도 있다던 형부헌티 시집까지 가부리드니 영동엔 잘 오지도 않어서, 나는 언니가 얼마나 미웠나 모른다. 나는 영영 잊었나 혔어. 언니를 잃은 거 같었어. 영동에 오지 않는 언니가 밉기도 혔는디, 실은 형부헌티 가버린 언니가 얼마나 아까왔나 모른다. 농사 지으면서 매일 매일 볕을 쐬도 뽀얀 살에 곱기도 곱던 언니가, 학교도 안 갔는디 혼저 글도 읽고 쓸 줄도 아는 똑똑한 언니가, 빈털털이로 피란 온 홀애비한테 시집 든 것이 을매나 아까왔나 몰라.


내 서운함이 무색하게 언니는 형부랑 언니를 똑 닮은 아들 둘을 낳아 장사를 시작혔지. 까만 고모신도 팔고, 떡을 떼다 다라이에 담고 머리에 이고 지고 나르며 떡을 판다고. 힘은 들어도 돈 버는 재미가 있담서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조금 안심이 되얐어. 얼마 안가 나두 매곡면에 좋은 사럼이 있다고 혀서 시집을 가구, 딸애가, 아들이 줄줄이 생기구, 입은 느는디 농사를 지어두 어떤 해는 늘 가난혀서, 사는게 맘 같지 않여서, 어뜬 날은 배두 곯고 하믄서, 우리 언니 보러 서울 가야지 가야지 하믄서도 언닐 자주 보질 못혔어. 그려두 서울 서 돈 버는 똑똑한 울 언니, 언니는 내 자랑이구 언니 조카 딸의 자랑이었어. 서울에 이모가 산다구. 그게 우리 경숙이 자랑이었어. 애들 젖 물리고, 밥 혀주고, 농사 짓구, 서방 옷 다리구, 시엄니 뫼시며 욕보믄, 언니헌티 연락은 못혀두, 언니가 나를 귀허게 여긴 걸 떠올리며 살었어.


몇 십 년을 안 보구, 못 보구, 전화만 오가고. 나중엔 그것두 잦아 들어서, 나헌티 언니 얼굴은 젊고 뽀연 얼굴만 남었는디. 구찮어서 내 얼굴도 잘 안보게 되지만 가끔 손거울 들어 얼굴을 비챠 볼때믄 ‘내가 이릏게 늙은만큼 울 언니도 많이 늙었겄지.’ 하믄서 나이 든 언니 얼굴을 생각만 혀봤지, 보질 못혔는디. 그래서 아적까정 언니는 나헌티 뽀연 얼굴인디. 전화라도 혀서 워쩌케 지내는지 물어 볼려구 했는디. 인쟈 전화를 혀두 잘 들리질 않응게 뭔 소용인가 싶어 담에 날이 따뜻하믄, 그라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디. 집 앞여만 나거는 것도 숨이 차 엄두가 나지 않여서 못 봤어. 울 언니 보구싶은 생각은 가득 였는디.


보두 못허구, 전화를 해도 받을 수가 없게 됐다고 하니께 너무 섭섭햐. 다 틀렸어. 울 언니 집 앞에 꾸려놓은 가게 앞에 앉아 가지구, 또 꾸벅꾸벅 졸면서 손님 기다리고 있겄지, 봄이 오니 고구마 순을 다듬겠지, 냉이를 들여다 팔겄지, 생각허고 싶은디. 이쟈 다 틀렸어.


언니, 그려두 한 편으로는 솔찬히 안심이 도ㅑ. 난중에 내가 죽으믄, 죽어서 인민군이 부섴에 숨어 들어 온 그 날처럼 내가 또 달달 떨고만 있으믄, 언니가 워서 나타났는지 몰러두 워디선가 나타나 내 어깨를 그날처럼 요롷고롬 단단히 잡아 안아 줄 거라구 생각하믄, 죽는 게 무섭지 않어. 죽음을 똑바루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여. 그라믄, 죽음을 똑바루 쳐다보믄 언니 얼굴이 보일 거 아녀. 계속 상상만혀고 보질 못헌, 그리븐, 구 십 두 살의 언니가. 조금만 기다려. 곧 갈텡게.







2022년 2월 7일, 세상을 떠난 나의 할머니 영겸을 위해, 그리고 아직 그 소식을 모를 할머니의 동생을 위해 썼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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