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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끝에 들려온,
딸의 한마디"

"엄마, 나 노숙자 부부 인터뷰하고 싶어." 그 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by 감차즈맘 서이윤


딸의 전화 한 통에 무너졌던 그날 이후,

나는 처음으로 '기다림'이라는 긴 시간 앞에

조용히 마주 앉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아이를, 그리고 나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파도처럼 밀려오던 자책과 후회는

쓰나미처럼 몰아쳤고,

나는 그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사람처럼

의욕이 상실된 채로

무기력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때, 아들이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엄마, 괜찮아? 가 아니라... 엄마,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려 했을 때

아들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엄마가 원하지 않았어도, 누나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결국엔 허락해 줬잖아.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이제는 누나가 감당할 수 있게

우리는 단지 시간을 주고

기다려 주면 돼."


그 말이 왜 그렇게 눈물 나도록 따뜻했는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기다리는 거야 "


내 말에 아들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같이 기다려 줄게. 걱정 마.

우리 재밌게 시간 보내면서 기다리면 돼.

얼마 안 남았어"


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을 깨고,

아들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난..... 누나의 용기가 부러워.

무모하다 할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바라보는 열정과 담대함....

나라면 못 했을 거야."


아들의 그 위로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봄비에 얼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듯,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조금씩 메워 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말이 없던 딸이 조용히 말했다.


"엄마,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보고 싶어,

내 실수였어."


딸아이의 그 '실수'라는 말속에는

누구 탓도 하지 않는 성숙함,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한 반성,

그리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제 이 아이는 혼자서도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지켜 봐 줄 준비가 되었구나.


그렇게 반쯤은 타의로, 반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나는 아이와 함께 'gap year'라는 시간 앞에 마주 앉았다.


문득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산타모니카 해변을

혼자 걷는 날들이 많아졌다.


불쑥 올라오는 눈물에 사람들 몰래 고개를 돌려

서둘러 눈물을 훔치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 무렵,

딸이 졸업 전 프로젝트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이곳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다닌다는 사립학교에서 진행하는 것이었고,

아이가 원하면 유명한 사람들과 인터뷰하며

좋은 기회들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나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매일 걷는 해변 길 옆에 계신 그 노부부 있잖아."


처음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몰랐다


"누구?"


"그 도로 한쪽에 항상 앉아있는 나이 든 힘없는 남자와

또 초라한 옷을 입은 여자 봤잖아?"


"아. 노숙자 말하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항상 같은 자리에 길바닥에

앉아있는 그 노부부.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묵묵히 앉아있던 '그들'.


그러자 딸이 말했다.


"엄마, 나 '그분들' 인터뷰하고 싶어.

프로젝트로 글을 써 보려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왜? 유명한 사람들도 많잖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그들일까,

머릿속이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러자 딸은 조용히 대답했다.


"엄마, 난 그분들의 삶이 궁금해.

우리가 지나가도, 사람들이 지나가도

한 번도 돈을 달라고 하는 걸 본 적 없어.

근데 이상하게 행복해 보여. 진짜로 웃고 있어.


학교에는 부자인 사람들도 많고 잘난 친구들도 많아.

그런데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본 적이 없어.

그래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어.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은 무엇을 꿈꾸는지.


그리고 혹시 기금이 모이면,

작은 쉼터라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날 딸은 그들을 *그분들*이라 불렀고,

나는 여전히 *그들*이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아이는 정말 '다르다'는 것을


그날, 나는 KO완패를 당했다.

아이의 시선은 나의 시선도, 세상의 시선도 아니었다.


그건 완전히 또 하나의 세계를 향해 열린,

따뜻하고 넓으면서 깊은

또 다른 시선이었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이 아이는 갭이어를 선택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래서 이 아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그렇게 따뜻했던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날 나는 다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슬퍼하지 말자.

이 아이의 길을 믿고, 미련 없이 보내주자고.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익숙했던 풍경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냥 스쳐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고,

저는 하루하루 조금씩

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애썼다.


그리고 그 아이의 선택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만 했다.


딸의,

나와는 다른 시선,

그리고 다른 방향.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우리 앞에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와 제가 함께 지나온

그 gap year의 시간은.....

딸에게는 진짜 삶을 마주한 용기의 시간

그리고 책임의 시간이었고,


엄마인 나에게는

'다름'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자락에서,

딸은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은 단순한 대학 합격이 아니었다.


딸이 걸어온 그 길은 빠르지도, 남들과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더 단단했고,

그래서 더 소중했다.


그 시간을 믿고 지켜보며,

저는 이제야 조금, '엄마'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간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배우고 깊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되는 길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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