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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에게 이런 일이 올 줄이야"

나는 그렇게 멈춰야 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나의 시간....

by 감차즈맘 서이윤


아름다운 해변을 바라보던 어느 날....


늘 그랬듯, 아침이면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강아지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어느 날처럼 평화로운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잔잔한 파도를 바라보며,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


삶의 끝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어."


그런데 그때,

딸아이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마치 기상청에서 미리 폭풍을 알려주듯

삶의 위기에도 '예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의 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비가 쏟아지고 눈이 몰아치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늘 생각했다.

'나만큼만 열심히 살면 된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아이 키우는 일은 원래 어렵다'는 말도

책에서도 주변에서도 수없이 들었지만,

하지만 그 말이 정작 내 이야기가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마 내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감정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한없는 허무.

그날 나는 그 모든 감정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아이들을 낳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중심은 '나'였다.

모든 일은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난다고 믿었다.

세상에 두려운 것도 없을 만큼,

나는 오만했고, 거만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순간,

그 믿음은 서서히 무너졌다.


딸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일이, 세상을 다시 배우는 일이 되었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나는 늘 아이의 앞길을 닦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었다.

유일한 동양인 엄마로 교실에 앉아 웃었고,

불편한 자리를 견디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나를 지키는 방패였고,

동시에 나를 고립시키는 벽이었다.


결혼 전에, 아무도 바꾸지 못했던 나였는데

딸은 그런 나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만나기 싫은 딸아이 친구 엄마에게도

생글생글 웃으며 "하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가고 싶지 않은 모임에도

"원래 너를 좋아해"라는 얼굴로 웃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하나뿐인 동양인 엄마로서

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떤 주는 두세 번씩

선생님을 도와 봉사하며,

교실에서 늘 친절한 얼굴로 가면을 썼다.


혹시라도 아이가 불이익을 받을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그렇게 아이를 지키며 살아왔다.


열심히 아이를 키우고,

밥을 해 먹이며

아이가 원하던 바이올린을 시켰다.


주변에서는 '똑똑하니 공부시켜야지'라는 말이 많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아이가 원하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그 길을 같이 걸어주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하기 싫은 일도 하고,

듣기 싫은 말도 들으며,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도 부딪히며,

나의 인생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견디며 살아왔다.


그 길은 분명, 아이를 위한 길이었다.

아이의 꿈을 위한 여정이었지만,

돌아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길은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길이 되어 있었다.


누가 달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늘 달리고 있었다.


멈추는 법을 잊은 채,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온 힘을 다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말없이 눈물이 흘렀고,

어느 순간 소리 내어 주저앉아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아이의 꿈을 밀어주려 달려온 줄 알았지만,

사실은 두려움을 밀어내려 달려왔던 거였다.


멈추고 나서야 보였다.

아이의 길과 나의 길이,

어느새 하나로 뒤섞여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배우기 시작했다.


IMG_6658.HEIC 딸의 전화 한 통에 나는 한 송이 꽃처럼 조용히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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