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아이만큼은 얼굴이 작게 해 주세요
그런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나는 생활 곳곳에서 얼굴크기와 관련된 수치심을 만났다. 나처럼 얼굴이 커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생각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자기가 얼굴이 큰 것 때문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낄까?'. 미용실에서는 나보다 얼굴이 작은 원장이 머리를 해주면 그날은 머리가 예쁘게 돼도 내가 예뻐 보이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가 남긴 내 존재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은 그렇게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에게서도 점점 동생을 보는 눈과 나를 보는 눈도 다르게만 느꼈다. 이제는 얼굴이 큰 것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몸, 내 살집과 뼈대가 부끄러워지는 사건들을 만났다. 뭘 입혀도 야리야리하고, 마르고, 얼굴이 작은 동생. 옷이 다 예쁘게 소화되는 동생과 다르게 뼈대가 굵고 살집이 있어 무슨 옷을 입혀도 맵시가 나지 않았던 나. 옷을 고르는 엄마에게선 늘 한숨이 보였다. 그러니 옷을 고르고 예쁘게 입는 것은 일찍이 포기했고,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스트레스인 옷에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함께 사진 찍고 싶으면서도 얼굴 크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두 가지 감정을 항상 느꼈다. 나보다 얼굴이 작고 나보다 뼈대가 얇은 것 같은 남자친구. 이런 생각은 길을 걸으면서도 스쳤다. 우리 커플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자친구와 나의 얼굴크기 차이, 뼈대의 차이를 보고 수군거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걷다가 건물에 비치는 우리 둘의 모습에서도 그런 차이를 스스로 느끼는 날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남자친구에게 마음이 토라진 날에는 다른 이들에게 비칠 우리들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별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너무 웃기고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역기능적이고 기이한 생각의 확장이지만 내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은 이별까지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웨딩촬영하는 날에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결혼식을 하던 날에도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모른다. 이렇게 수치심은 본질을 가린다. 비본질에 집중하게 만들고, 존재로서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행복함을 누리는 것에 장애물이 되었다.
수치심이 건드려질 때마다 이별을 고민했던 남자친구와는 다행히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헤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와 결혼을 하고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그런데 하루는 딸들이 그저 보이는 대로 순수하게 말을 했다.
"엄마가 아빠보다 얼굴이 큰 것 같은데?" (두둥)
결혼하고 육아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줄어들자 내 얼굴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아만 하면서 얼굴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보는 눈이 생긴 딸들이 좀 크자 하는 말. 엄마 얼굴이 아빠보다 크단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잠자던 수치심이 눈을 떴다. 내가 가진 수치심의 영역을 알고 있던 남편에게서 당황스러워하는 에너지가 느껴졌고, 애써 무마하려고 말을 하는 그는 누가 봐도 어색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하며 "그렇지? 그런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나의 모습은 숨겨지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이렇게 기도했다. 제발 아빠의 얼굴형과 골격을 닮게 해달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어딘가 이상한 기도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똑똑하게 해 주세요. 이런 것도 아니고 아빠의 얼굴형과 골격이 기도 제목이라니.
초음파를 볼 때면 턱선을 보았고, 나와 닮지 않는 뾰족한 턱을 보고는 '휴, 다행이다' 안도했다. 태어나서 사람들이 아이의 얼굴이 작다고 말하면 그 말은 확성기로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그리곤 '휴, 성공했다' 라며 기뻐했다. 무슨 이런 기이한 반응이 다 있나 싶지만 그만큼 얼굴 크기, 얼굴 형에 민감한 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는 나를 아이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내가 보이는 반응으로 아이가 기준을 가지게 된다면 아이는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되겠는가.
이제 8살이 된 딸아이가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는 너무 뚱뚱한 거 같아."
내 딸은 전혀 뚱뚱하지 않은데, 그리고 신체적인 면을 평가하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나’처럼은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소름 끼치게 똑같이 내가 나에게 말하던 평가를 내 아이 입에서 들었다. 자기가 뚱뚱한 것 같아서 예쁘지 않다고.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에 나의 수치심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수치심은 아이를 존재 자체로 소중하게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상처받았던 기준으로 아이를 보게 한다. 이렇게 본질(존재 자체)이 아닌 비본질에 집중하며 사는 모습이 내 아이에게 아주 조용하지만 강하게 대물림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내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 자체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엄마가 된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할 시급한 이유를 찾았다. 내 아이에게 "너는 존재 자체로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단다" 가슴에 남도록 말해주기 위해서. 내가 나를 먼저 귀하게 여겨야 한다.
"얘야, 너는 존재 자체로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