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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 헤아림 Jul 10. 2023

아빠는 큰 바위 얼굴, 나는 작은 바위 얼굴

얼굴이 큰 내가 부끄럽다.


"너를 낳을 때 머리가 하도 커서 골반에 머리가 끼었어. 압축기로 머리를 뺄 정도였지"

"그래서 머리에 동그랗게 자국이 있었어"

"너 낳을 때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나 몰라"

"여자애가 남자애 마냥 뼈대가 크고 굵어서..."


 거울을 보다가 오늘따라 얼굴이 커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아 진다.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으로 가려도 소용이 없는 나의 큰 뼈대가 내 존재 자체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동생은 정반대였다. 뼈대도 얇고 얼굴의 골격도 나와 다르게 작았다. 그러니 나의 동생을 출산했을 때의 어른들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동생은 아주 쑥~ 나왔지. 네가 다 넓혀놔서."


 내가 다 넓혀놨다는 말을 굳이 왜 할까. 그들은 비교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출산할 때의 머리 크기조차도 비교당해야 하는가 싶어 괴로웠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더니.  무심코 던진 말들에 나의 존재가 부끄러워졌고, 내 존재를 내가 부정하고 싶었다. 이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를까.




 이렇게 얼굴이 커서 슬픈 여성으로서 나는 일상 곳곳에서 이 수치심을 만나야 했다. 거울에 설 때마다 만나야 했던 나의 얼굴. 친구들과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도 보게 되는 내 얼굴. 웃기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얼굴이 작은 친구가 내 옆에서 손을 씻거나, 양치를 하게 되면 나는 고개를 얼른 숙이고 빠르게 마무리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 부끄러운 나를 내가 피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아주 재빠르게.


 중학교 때 일이다. 동네 보습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던 중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얼굴 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춘기 소녀. 티 내지는 않아도 내심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한창일 그 소녀에게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이 했던 말은 잊히지가 않는다. "뭐, 유선이는 얼굴이 좀 큰 편이긴 한 거 같은데?" 그 이후 상황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모멸감을 느꼈다는 감정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미 나도 알고 있는데.' 안 그래도 친척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 있었던 터라 가볍게 듣고 흘리기에는 비수 같은 말이었다.


"너네 아빠는 큰 바위 얼굴이고 너는 작은 바위 얼굴이고. 이마는 소가 핥아놨네. 깔깔깔"

 아빠를 닮아 얼굴이 크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은 웃자고 말했고, 그들은 말하면서 진짜로 웃었다. 깔깔깔.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또 말한다. 얼굴이 예쁘니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다 넘기고 다니란다. 친절하게 귀 뒤로 머리카락까지 넘겨주면서. 어린 시절의 나는 '도대체 이 어른들이 무슨 심보로 나에게 이러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를 향한 사람들의 예쁘다는 말들은 어딘가 모르게 비꼬아진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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