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 하지만 가정을 벗어나 산지 참 오래 지난 나다. 16살에 기숙사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순식간에 24살이 되었다. 20살때부터 혼자 자취를 시작했으니 이제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1인가구다.
서울에 원룸을 구하러 가기 하루 전 날,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이 있었다.
"서울 가서 잘 살겠나. 내로라 하는 애들 다 거기 있는데. 거기는 여기랑 다르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부모도 잘 나가는 애들 사이에서 네가 기 안 죽고 살겠나."
그 말을 듣고 나는 거의 비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엄마, 내가 뭐가 모자라나? 누구 딸인데!"
그로부터 4년 정도가 지났는데, 지난 날을 회고해보면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거짓말을 쳤다. 상경하고 초반에야 서울 길거리만 걸어다녀도 신났지. 이제는 거리를 오가며 간판 구경만 해도 터무니 없이 치솟는 밥값에 '지갑을 꽁꽁 지키자', '정신 똑바로 차리자' 하며 집에 그대로 돌아오는 날이 많다.
오랜 나의 숙명. 50만원의 생활비로 한 달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일. 20살 때는, 처음 받은 용돈 50만원이 너무나 큰 돈처럼 느껴졌는데, 딱 한 달 살아보니 알겠더라. 아, 이 돈만으로 서울 살려면 좀 굶어야겠구나. 그렇게 한 6개월은 햇반, 참치, 쌈장, 간장으로 하루 두 끼만 먹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본가에 가니 엄마가 나더러 그랬다.
"머리가 와 이렇게 많이 빠졌노"
그러고 보니 거울 속 20살짜리는 정말 많이 비어 있었다. 정수리가.
엄마 아빠는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전화 받을 때마다 했던 "오늘은 ~ 먹었어"의 대부분은 거짓말이었다. 통장에 딱 2만원 있는데 아직 한 달이 일주일 넘게 남았을 때의 공포스러움은 이제 지겹다. 내가 마음 놓고 쉬지 못한 채 대학생활을 국밥 먹듯 후루룩 끝내 버린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어떻게든 이 지겨운 거짓말을 빨리 끝내야 한다.
엄마는 어느 정도의 궁핍은 삶을 살아갈 지혜를 준다고 했었다.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는 순간부터 그저 궁핍한 사람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궁핍'은 오늘을 즐기지 못한 채 내일부터 걱정하게 하는 조급함을,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진심보다 선물에 빠져나갈 돈부터 걱정하는 쪼잔함을 준다. 아무 거나 입어도 좋고, 아무 거나 먹어도 좋고, 아무 데서나 자도 좋은 무던함을 낳은 것도 사실 궁핍이었다.
올해 가정의 달은 특히 반갑지 않다. 옛날처럼 어버이날에 편지 하나 써도 엄마 아빠가 행복해 하고 뿌듯해 하는 나이는 진작에 지났다. 뭐라도 하나 드려야 되는데, 드리고 싶은데, 그 마음을 어린이날인 오늘에 쓰고 있다. 낳아주셔서 감사한데, 티없이 맑았던 어린이가 거짓말쟁이로 자라버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