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보면 모든 돈 벌이의 끝은 내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재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을 때 끝났다. 오랜만에 이 사실을 다시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난 요즘 세상에 전하고픈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하고픈 가치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 시간을 온전히 쏟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숨고'라는 어플을 수단으로 삼았다. 이 어플에 나는 카피라이팅, 영상편집 고수(高手)로 가입했다. 고객이 카피라이팅을 해줄 사람, 영상편집을 해줄 사람을 찾으면 내가 그 사람과 매칭된다. 문제는 해당 분야의 고수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적자생존의 구조로 인해 나는 일주일간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플을 오래도록 사용해 본 사람이 무조건 유리하다. 허나 '후기'라는 든든하고 화려한 무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무료'를 선택하고 선언했다. 재능기부나 하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내 재능을 건네어 보자고! 물론 나의 재능이 썩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 그러나 갈고 닦을 준비는 되어 있었다. 무료로 재능기부 하면서 갈고 닦으나, 혼자 고고하게 갈고 닦으나 마찬가지고. 그럴 바에는 무료로 재능기부나 하는 쪽이 낫잖아?
내 인생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이 글쓴이는 꽤 오랜 시간 글쓰기를 짝사랑했다. 쓰기 실력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늘지 않았으며, 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서도 ... 24살이 된 오늘도 여전히 쓴다. 인생에 있어 어떤 남자도 짝사랑해 본 적 없으면서. 기록을 이토록 오래 동경하는 이유는? 졸업은 해놓고 컴활도, 토익도, 인턴 경험도 하나 없으면서! 하지만 왜인지 글을 더 읽고, 더 써야 내가 잘 될 것만 같은 환상에 빠져 있다. 아직도 철이 안 든 거다.
각설하고, 해 본적도 없는 카피라이팅 작가로 숨고에 가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정철 카피라이터가 좋다.
2. 정철 카피라이터처럼 되고 싶다.
3. 한 문장에 사람을 웃고 울리는 말재주를 갖고 싶다.
결국 가만히 앉아서 글이나 요리조리 조합하며 돈 벌고 싶다는 심보다. 컴활도 따기 싫고, 영어도 하기 싫다는 배짱이기도 하고. 물론 카피라이팅은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아니다. 돈을 빠르게 모으고 싶었다면, 자소서 과외나 했을 것이다. 3년간 자소서 과외를 하면서 느낀 점인데,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편지 한 번 쓰지 않으면서 대입, 취업 자소서는 가족이라도 팔아 넘길 기세로 쓴다. 그렇기에 진심이 묻어나기 참 힘들다. 사랑하는 이에게 쓰는 러브레터보다,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쓰는 러브레터는 몇 십 배로 골머리가 아프니까.
그리고 의뢰인의 '진심'을 어떻게든 쥐어짜내서 활자에 그득그득 채워넣는 것까지가 나의 임무였다. 그들의 글이 그렇게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고, 새벽을 지새어도 참을 만 했으며, 의뢰인도 나름 만족했으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의 교집합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자소서 과외를 할 수는 없다. 나도 이젠 입시판을 떠난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입시 트렌드에 맞지 않는 글로, 누군가의 인생에 불합이라는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다. 고로 그것은 몸이 편하게 돈을 버는 방법이지만서도, 마음은 불편한 일이 되었으니 그만두는 게 맞다.
그렇게 마친 3년의 자소서 과외 임무 이후, 숨고 어플에 카피라이팅 고수로 가입할 줄이야 나도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백수로 있다간 누구보다 빠르게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 뻔했다. 이에 앞으로는 숨고 어플에서 무료 재능나눔을 하며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조금씩 남겨 보려 한다.
첫 번째 의뢰인은 아파트 상가에 요거트 전문점을 차리는 여자 사장님이었다. 이런 저런 요구사항이 많았는데, 3가지의 시안을 드렸으나 다 마음에 안 드신다 했다. 재능나눔이지만 사실 나눌 재능이 없었던 건 아닐까? 잠시 의심스러웠지만 다시 하기로 했다. 일요일 밤 12시까지 계속 머리를 굴린다면, 그 여자 사람 한 명에게 마음에 드는 단어 하나 정도는 분명 발굴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바로 내일이긴 한데 ...
두 번째 의뢰인은 진주시에 출마하시는 정치인의 슬로건을 부탁하셨다. '최신용'이라는 분인데, 특이점은 초선이시라는 거였다. 경선 지역에는 3선을 준비하는 저치 경력 20년이 넘는 분이 있었다. 그만 할 때도 됐다는 말이 나오는 추세였다. 반면 최신용님은 올해 57세였다. 상대적으로 젊음을 강조한다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보내 주신 기존의 카피는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문구였다. "새 시대, 새 인물"
저것에 대한 첫인상은, 저 문구 때문에라도 안 뽑을 것 같다? 고민의 흔적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니 새로운 카피를 찾으시는 거겠지. 암. 고객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새 시대, 새 인물"이 적용되게 해주세요. 청렴결백 / 젊음 / 미래 / 발전 / 현명한 선택 / 변화 / 변혁을 가져올 인물 / 혁신 / 도약의 의미가 담기게 해주세요.
네? 저걸 다요? (혹시 어릴 때 부모님께 과유불급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하여튼, 어찌저찌 완성한 카피는 다음의 두 가지.
1. 자연도, 자금도, 자유민주주의도 순환해야 발전합니다. 새롭게 흐르는 ‘최신’의 정치
- 도의원 출마예정자 최신용 -
2. 자연도, 자금도, 자유민주주의도 순환해야 발전합니다. 새롭게 흐르는 ‘최신’의 정치가 최선
- 도의원 출마예정자 최신용 -
결국 젊은 사람 뽑으라는 얘기다. 원래 하던 사람 치우고, 새로운 사람한테 기회 주라는 거다. 순환하는 것이 만물의 진리라는 거, 느낌 아니까~ 최신용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게 포커스였다. 포스터 색도 파랑으로 통일하셨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국민의 힘에 속한 정치인이셨다. 승선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 의뢰인은 ... 오늘 내가 이 글을 쓴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하셨다. 청소년 자치활동 지원센터였는데, 대표님 말로는 사회적 기업으로 승인 받을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분이 원하시는 카피라이터는, 청소년에 대한 이해도가 바탕이 된 사람이랬다. 작년의 난 임용고시 준비를 했으니, 더더욱 나에게 잘 매칭되었다고 생각했다.
단체 대표님이 위의 멘트와 함께 이런 저런 소개글을 메일로 보내셨길래, 나도 답장을 드렸다. 다음은 내가 단체 대표님께 드린 메일의 전문이다.
안녕하세요. 장소현입니다. 이른 새벽이네요.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는데, 여느 날과 달리 제게 어떤 새로운 기회가 들어온 것 같아 기쁩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진심으로 동감합니다. 또한 저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줬던 말이기도 합니다. 입으로만 전파하기보다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어린 날의 저는, 당장 시작되는 한 달을 벌어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하여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에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갔고, 덕분에 지금은 적어도 "오늘 하루 뭐 먹고 버티지"라는 고민을 하진 않게 되었네요.
여러 사람의 커다란 꿈과 희망이 모여 귀 단체와,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으리라 봅니다. 그곳에 커다란 돈까지 함께 들어와 줬더라면 금상첨화이겠으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돈이 되는 쪽에 돈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청소년 관련 사업, 교육 사업은 여전히 20년 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을에서 잔디라도 깎겠다는 마음으로, 추후 카피라이팅은 전부 무료로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추후에 서적 출판이 시작된다면 그 부분은 페이를 받겠습니다. 아마 그 쯤 저도 업무적으로 많이 성장해 있으리라 생각해서, 출판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아쉬움이 없어야 더 열정이 생길 테니까요.
다만, 좋은 인재들을 모집해서 제대로 된 컨텐츠를 제작했으면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영상 촬영, 편집, 음반 발매, 굿즈 제작 등에 있어서 전문가들이 모집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의 청소년들은 학교 밖에서 너무나 양질의 컨텐츠를 어렵지 않게 접한 세대입니다. 고로 구세대인 저희가 구세대 때 봤던 컨텐츠 수준에 맞춰 제작한다면, 그 의도가 어떻든 청소년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 용기받기는 힘들 것입니다.
추가로 전달받은 영상을 훑어 보았는데,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카메라도 좋고, 편집도 잘 되어있는 편이나 조회수가 많이 낮았던 이유와 다른 단체들의 선례를 잘 분석해서, 일정 수준의 조회수를 확실히 확보할 수 있는 콘텐츠였으면 합니다. 적어도 고작 며칠, 몇 달 고민해가며 만든 유튜브 영상보다는 훨씬 고퀄리티의 완성본이 나왔으면 하는 바이고. 제 의견에 대해 그럴 수 있으리라는 비전과 확신이 있으시다면 참여하겠습니다.
늦은 저녁까지 고심해서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소현 드림.
저 메일에서 내가 "추가로 전달받은 영상을 훑어 보았는데,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그건 단체 대표가 나에게 보낸 지난 프로젝트 영상 때문이었다. 그래도 ... 돈을 그렇게 들이셨다는데, 훑어보니 콘텐츠에 들이신 금액에 비해 퀄리티가 훨씬 못 미쳤다. 만약 내가 카피라이터로 참여한다면, 결과물은 적어도 보장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대표는 돈 = 퀄리티라시며, 자신은 그 영상을 제작할 때 영상 제작 업체에게서 사기를 당했었다고 했다. 음 ... 그때부터 왜인지 둘이서 대립 상태가 되었다.
결국 어찌 저찌 갈등이 생겼다. 새벽 2시 반에 이름 모를 단체 대표와 통화를 하며 나는 상당히 의아했다. 왜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재능나눔을 하려고 전화를 받아놓고 훈계를 듣고 있는가?
하여튼 결론은 내가 더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는 의지가 다 빠졌다. 침대에 퍼질러 잤다. 일어나서 보니 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나랑 새벽 2시 반까지 전화를 했던 그 대표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숨고 어플로 다른 전문가를 찾는 요청서를 보냈다. 분명 난 고민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안녕하세요. 대체 가능한 인재입니다."
문득 어딘가로 취업을 한 뒤의 내 모습이 상상되었다. 내 인생은 어딘가에 소속된 즉시 구속되고. 그곳에서 짤리는 즉시 미궁속으로 빠지겠지.
대체 불가능한 인재는 아니어도, 대체 불가능한 사람은 되고 싶다. 선택하지는 못해도, 우습게 버려지진 않고 싶다. 취업이 아니더라도 전업은 찾고 싶다. 내가 아니면, 또 비슷한 사람이 없어서 상대방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는 그런 일도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