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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리너 Jun 06. 2021

한글 책은 귀해서 빨리 읽으면 안 되는데

이역만리 이 나라에서 한글로 쓰인, 한글 책은 너무 귀하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 주문할 수도 있고, 교민사회 사이에서도 한글 책 거래 플랫폼은 여럿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은 책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고 제한적이기에, 귀한 물건이다. 

한국에서 다시 돌아오는 내 캐리어 무게의 절반은 책 무게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엄마표 반찬, 한국음식 다음으로 중요한 게 바로 책. 


내 책 취향은 편식 없는 잡식성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듯하다. 추리, 공상과학 같이 무게 강한 장르물이나 자기 계발서는 읽지 않는 편이고, 인문/사회 논픽션이나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좋아한다.

한국이었다면 지하철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조금은 잡념에도 빠지거나, 주변 소리에 잠시 집중도 잃으면서 페이지를 훨씬 빠르게 넘겼을 텐데 여기서는 천천히 읽는 편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여서 내가 이렇게 한글 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영어로 쓰인 책들 중에도 훌륭한 책들이 많은데?

영어로 매일 읽고 쓰고 일하다 보니 지겨워서, 여가시간에는 도피성으로 한국어만 찾는 걸까?

아무도 묻지 않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했다.

결국 정답도, 오답도 없는 질문인데 말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 한글이 주는 그 광범위한 표현의 스펙트럼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미묘한 감정, 의도, 생각이 너무나도 풍부하게 다가온다. 

학부 때 영어학을 전공했던터라 본업 외로 한국어-영어 통번역을 참 많이 해왔다. 그렇다 보니 일종의 어설프게나마 직업병 비슷하게, 한글 책이나 영문 책을 읽다 보면 '이걸 번역하려면 뭐라고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종종 해보기도 한다. 혹은 원서를 번역한 책을 읽다가 '이건 원래 어떤 문장을 번역한 건지 알겠다' 싶을 정도로 기계적으로 번역한 표현을 보며 아쉬우면서도 번역자분께서 얼마나 고충이 컸을까라며 경외심도 든다. 

분명 영어로는 번역하기 힘들거나 단 하나의 단어로만 수렴되는데 한글로는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는 형용사, 동사, 부사가 많다. 


어떤 단어를 쓰냐에 따라 공손함이나 무례함을, 냉정함이나 따뜻함을 넘나들 수 있다. 시사, 사회이슈를 다루는 책보다 특히 인간의 삶, 행동, 감정을 망라하는 소설에서 그 스펙트럼이 폭발적으로 넓어진다고 느낀다. 

얼마 전에는 정말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이도우 작가님의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과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으며 이 생각을 시도 때도 없이 했다.

남녀 간의 사랑, 너무나도 흔한 주제인데 그렇기에 제일 어려운 주제일지 모른다. 그 사랑이 자라나고, 어긋나고, 저릿하게 다가가는 그 과정이 펼쳐지는 데 도무지 영어로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들이 수도 없이 튀어올라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 나라에서 한글 책 한 권 끝날 때, 완독 했다는 뿌듯함도 잠시, 곧바로 지극히 현실적인 아쉬움이 밀려온다. 

'아, 새 한글 책을 꺼내야 하네...'


한 권 다 읽고 그 책의 내용이 잊혀 갈 때 즈음, 몇 달 뒤 다시 꺼내 읽는다. 

귀한 물건, 한글 책 속 글자들을 천천히 눈으로 아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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