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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Sep 20. 2019

[Enough Alone]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2

# 길을 만나다

먼저 고백하건대, 까미노를 걸으면서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첫 날부터 처참히 무너졌다. 평균 30일 전후의 일정으로 까미노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8km 이상, 25km 내외의 길을 매일 걸어야만 한다. 나는 여기서부터 오만을 부렸다. 평소에 걷기를 즐겨 하고 도보 여행도 부지런히 다니는 터라 ‘할 만 하겠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10kg은 족히 나가는 몸체 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일은 일상적으로 걷는 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급기야 프랑스길의 첫째 날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걸친 피레네 산맥을 넘는 산행이 필수인데, 그 사정을 자세히 몰랐던 데다 등산이라고는 관악산 둘레길이나 걸을 줄 알았던 나는 무릎이 마비되는 고통을 몇 차례 겪으면서 급격하게 자신감을 상실했다.



여기에 고통을 배가시키는 정신적인 두려움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였다. 겨울에 접어드는 11월 중순은 까미노의 비수기가 시작되는 시기인지라 걷는 동안 다른 순례자들은커녕 인적을 마주치는 일조차 드물었다. 피레네 어디쯤의 계곡길이나 나무가 우거져 볕이 잘 들지 않는 오솔길을 혼자 걸을 때면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으레 숲에서 들릴만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다 누군가 뒤에서 불쑥 나타나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되려 깜짝 놀란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어떤 때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가운데 홀로 고립된 느낌에 공황에 빠질 것 같은 공포심을 물리치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미노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따금 지독한 고독으로 몸을 떨게 하는 것도 문득 행복감으로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하는 것도 다름아닌 길이었다. 이를테면 소나기 끝에 먹구름을 뚫고 선연하게 떠오른 쌍무지개나 해지기 전에 가장 찬란한 햇살이 두 눈에 가득 찰 때면 언제 어디서라도 처해있는 상황과는 관계없이 황홀경에 다다랐다.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강렬한 노을, 새벽 하늘에 태양처럼 떠오른 황금빛의 보름달과 고즈넉히 빛나는 별빛은 당장이라도 눈 앞에 그려질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다. 피레네 산맥에 달하는 고도에 잔뜩 긴장한 채로 맞닥뜨린 철의 십자가에서 자욱하게 감싸 오르던 안개비와 오 세브레이오의 설원 풍경은 그 두려움만큼이나 진득하게 각인되었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날것의 풍경들은 그 날 최악의 하루를 보냈든, 최고의 하루를 맞이하든 감히 운을 가늠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까미노의 경치를 한결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아닌 순례자들이었다.



* 이어지는 글 : [Enough Alone]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3 #.바로 그 사람들

** 산티아고 사진에세이 [까미노, 같이 걸을까]에 대한 소식은 텀블벅 http://tumblbug.com/becam​ino

및 인스타그램 @becamino_book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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