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바람 피러 갑니다.

YES or YES

by 위트코치 이용만

요즘 본의 아니게

시청하고 있는 19세 이상 관람가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어.
바람 피는 남자와 들키는 남자.


갑자기 아내가 날 쳐다본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건 알 것 같다. 드라마가 내게 준, 선택지는 딱 두 가지다.

'바람 피는 남편', '들키는 남편'.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다.

일단, 바람 피는 것이 먼저다.


억울한 옥살이가 눈앞에 훤한데도,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심정 또한 이러했을까.




[아내의 취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허위자백'뿐이다.]


성인이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는 강압적인 심리 수사 기법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수사 과정은 엄청난 압박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다. 이렇게 조사를 받다 보면 어느 순간 한계점에 이르게 된다. 경찰의 수사 기법은 피의자가 이 한계점을 넘어 자백하도록 설계돼 있다. 피의자가 신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자백하는 것뿐’이라고 깨닫도록 심리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중략)

영국 심리학자 기슬리 그뷔드욘손(굿 존슨)은 “자백을 하는 것이 범행을 부인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피의자는 자백을 하겠다는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때 결백하다는 점이 오히려 허위자백의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결백한 피의자는 나중에 변호사나 검사, 판사 등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리라 믿으면서 당장 경찰의 신문 상황이 주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허위자백을 결심한다는 것이다.

-한겨레, <때리지 않아도 허위자백 한다> 중에서.




잠깐 방심하고 있으면, 어느 타이밍에서 아내의 취조가 시작될지 모른다.

그래서 드라마를 함께 보는 시간에는 늘 긴장의 연속이다. 코로나 19는 마스크만 잘 써도 어느 정도 피해 갈 수 있다지만, 아내의 질문은 방독면을 잘 써도 피해 갈 수 없다.


지난겨울,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비주얼의 북한 군인과 더 비현실적으로 북한에 불시착한 재벌 상속녀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러브스토리였다. 아무튼 재벌 상속녀를 유심히 관찰하던 아내가 기습적으로 내게 물었다.


"오빠, 손예진이 예뻐? 내가 예뻐?"


내가 패러글라이딩하며 북한으로 불시착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성적 판단을 앞세우는 우를 범할 경우 이곳은 곧 북한이 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허위 자백하는 것뿐’이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디 손예진 따위가! 당신이 훨씬 예쁘지!"


그 순간 20년 넘게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난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내고 말았다.

당시 슬픔을 내가 좋아하는 김용택 시인의 '시'로써 조금이나마 달래 본다.




꽃집에 가서

아내가 꽃을 보며 묻는다.

여보, 이 꽃이 예뻐

내가 예뻐.

참 내, 그걸 말이라고 해.


당신이 천 배 만 배 더 예쁘지.


< 빈말 > 김용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