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시험은 떨어졌지만, 사랑은 붙었다.

by 베키



세상에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나는 늘 회의적이었다. 인연은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오는 허황된 이야기 같았다. 그런데 우리의 만남을 돌아보면, 그 허황된 이야기 같은 인연이 내게도 있었구나 싶다.


2020년 4월, 나는 세상이 부러워하던 첫 직장을 그만뒀다.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던 그곳은 들어가기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내 마음은 늘 불편했다. 규정과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속이 상했고, 상사들과 자주 부딪혔다. 결국 나는 스스로 사표를 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억울함과 화가 북받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날, 35년간 한 직장에서 묵묵히 근무했던 아빠에게 하소연을 했다. 나는 “원래 직장은 다 그래. 네가 참아야지.”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너 나이 땐 화날 수 있어. 그게 청년이야.”라며 나를 토닥였다. 그 말에 오히려 눈물이 더 쏟아졌다.


직장의 불합리함에 분노한 나는 청렴한 조직이라 믿었던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조차 순수했다. 아빠의 지지와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고, 세상을 더 정의롭게 만들고 싶었다. 무언가를 결심하기에 순수함보다 더 강력한 자극제는 또 없는 것 같다.







퇴사 후 나는 노량진으로 향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관리형 독서실에서 여름과 겨울의 감각조차 잃을 만큼 몰입했다. 우리 학원에는 남경 수험생은 많았지만 여경은 나뿐이었다. 남경들은 자연스레 스터디를 꾸려 서로를 도왔지만, 나는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들과 함께하면 목표가 흐릿해질 것 같았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스스로를 더 몰아세웠다.


겨울이 깊어가던 어느 날, 시험을 한 달 앞둔 시점. 그와 함께 공부하던 남경 동기들이 하나둘 떠났다. 어쩌다 보니 그도 혼자가 됐다. 시험 준비의 막판, 체력과 정신력이 가장 고갈되는 그 시기. 우리는 서로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금기시했던 이성과의 접촉도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목표를 향해 전쟁터를 함께 헤쳐 나가다 보니, 우리는 공부 파트너를 넘어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지칠 때면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됐고, 모의고사를 함께 풀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실력도 가파르게 올랐다.


나는 서울청, 그는 전북청에 지원했다. 결과는 그가 합격하고 나는 낙방이었다. 마음 한편엔 ‘이제 끝이겠구나’라는 생각이 자리했다. 그가 중앙경찰학교에 입교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라 생각했다. 나 역시 서울에 뿌리내린 사람이었기에 장거리 연애가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주말이면 중앙경찰학교가 있는 충주에서 서울까지 달려와 나를 챙겼다. 나는 사력을 다했음에도 떨어졌기 때문에 더는 미련 없이 수험생활을 마무리하고 플랜 B였던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공무원 준비로 굳어 있던 내 얼굴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그에게 마음이 깊어질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이 사람마저 잃게 되면 어쩌나.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술과 이성 문제에서 자유롭고, 허세 없고, 예의 바르고, 듬직한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꽉 쥐어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힘들다면 언제든 놓아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악동뮤지션의 노랫말이 딱 그때의 내 마음이었다.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그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아마 오빠도 나처럼,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삶이 바쁘고 힘들수록 만남은 줄었지만, 우리의 신뢰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우리가 꿈꾸는 가정의 모습도, 그 결도 닮아 있었기에 결혼 이야기는 자연스레 오갔다.


크루즈 디너나 근사한 반지, 로맨틱한 이벤트를 곁들인 화려한 프러포즈 대신 우리는 우리답게, 담백하게 약속했다.



“오빠, 어차피 나랑 결혼할 거지?”
“응.”
“그럼 빨리 하자.”

그렇게 우리의 초보 부부 생존기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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