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이하 라오어)는 제작 소식을 알게 됐을 때부터 기다렸던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HBO가 왕겜 후속 라인업으로 내놓은 시리즈였고 일찌감치 페드로 파스칼 Pedro Pascal 이 주연으로 낙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영화 <빈폴 beanpole>(2020)의 감독인 칸테미르 발라고프를 총제작자로 발표했었는데, 전쟁의 폐허와 남은 자들의 슬픔, 희망까지 아름다운 비주얼로 담은 이 영화가 라오어와 통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이건 정말 찰떡조합이다. 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유명한 게임 원작이라는 요소는 저에게 오히려 마이너스였는데요. 게임을 하지도 않고, 게임의 스토리래봤자 뻔하고 단순할 것 같고, 게임 원작으로 성공한 시리즈가 거의 없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 평단과 시청자, 원작팬을 모두 만족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이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촬영소식을 기다리던 중 총제작자 교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창작 의견차 때문에 게임의 제작자인 닐 드럭먼 Neil Druckmann 과 함께 크렉 메이즌 Craig Mazin 이 새로 참여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체르노빌>을 감명 깊게 봤던 닐과 마침 HBO에게 제안을 받았던 크렉의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서 두 사람은 라오어를 함께 제작하게 됩니다.
기다리던 작품이긴 했지만 제가 이 드라마에 진정 꽂힌 순간은 바로 첫 회 콜드오픈 씬이었습니다. 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해 탄수화물(밀가루) 제품에 서식하기 시작한 변종 곰팡이균이 인간을 숙주로 삼아 뇌까지 지배하여 좀비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다는 무서운 이 설정을,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흔히 다큐에서 내레이션과 함께 확대한 세포 분열, 세균 증식 등의 화면이 빠르게 편집된 몽타주를 많이 보셨을 텐데요. 닐과 크렉도 처음에는 효율적인 설명이 가능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오프닝을 생각했었지만 고민 끝에 60년대 토크쇼 설정의 긴장감 있는 씬을 만들어냈습니다. (대사만으로 만들어내는 고능한 호러..)
토크쇼 오프닝을 지나 시리즈는 2003년에서 시작합니다. 딸 새라, 동생 토미와 평화롭게 살던 조엘은 갑작스러운 팬데믹 사태에 대피하던 중 딸을 잃게 됩니다. 미국 전역을 덮친 이 팬데믹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20년이 흘러 2023년에 1시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요. 딸의 죽음 이후 밀수업을 해 오면서 살던 조엘은 어느 날 파이어플라이라는 조직 출신 친구의 부탁을 받게 되는데, 엘리라는 14살의 소녀를 무사히 그들의 본거지 보스턴까지 데리고 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조엘은 엘리를 그야말로 일로만 생각했지만, 둘은 폐허가 된 미국을 횡단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함께 넘기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됩니다.
감정 없이 살아오던 남자, 그리고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몰랐던 소녀가 모종의 사건들을 겪으며 유사가족이 되는 과정은 꽤나 클리셰적인 스토리인데요. 라오어만의 강점이라고 한다면 감염자 Infected 라고 불리는 포자좀비(라오어에서는 좀비라는 워딩을 쓰지 않습니다만 이해를 위해..)의 무시무시한 설정, 평행우주처럼 다른 세상 같기도 한편 동질감도 느낄 수 있는 동시간대의 디테일한 세계관 등일 겁니다. 닐과 크렉은 원작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이상적인 TV시리즈 극본을 만들었고, 이는 주인공인 페드로 파스칼과 벨라 램지 Bella Ramsey 의 폭발하는 케미로(ㅠㅠ) 완성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내 마음속 에미 남주/여주인 그들.. 1시즌때 못 받아서 억장와르르)
일단 닐과 크렉은 원작 게임의 배우들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제프리 라이트 Jeffrey Wright(아이작 딕슨 역 - 2시즌), 멀 댄드리지 Merle Dandridge(말린 역 - 1시즌)은 게임과 동일한 캐릭터를 맡았고, 게임에서 엘리 역할을 맡았던 애슐리 존슨 Ashley Johnson 은 극 중 엘리의 엄마로 특별출연합니다. 또한 게임의 조엘인 트로이 베이커 Troy Baker는 임팩트 있는 역할로 카메오 출연하며 방영기간 내내 애프터쇼 팟캐스트의 진행을 맡아 시리즈와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이 배우들이 오랫동안 몸담은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닐이 조엘과 엘리의 게임 캐릭터를 만들 때 애슐리, 테드의 본체 성격이나 취미를 반영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서, 애정이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더군요. 조엘이 기타를 치는 이유, 엘리의 꿈이 우주비행사인 이유는 테드와 애슐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게임에서 유명한, 팬들이 실사화를 기대했던 장면은 정말 뛰어난 고증과 디테일로 갈고닦아 보여줍니다. 대사는 물론이고 카메라 앵글이나 소품, 미장센 등까지 게임과 복붙 수준인데요. 물론 배우들의 미친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씬들이 더 빛났죠.
그리고 게임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인 오프닝 크레딧 음악도 시리즈와 동일합니다. 아르헨티나의 기타리스트 구스타보 산타올라야 Gustavo Alfredo Santaolalla 의 연주예요. (이 분도 2시즌 깨알 같은 카메오 출연을 하십니다.. 찾아보는 재미)
크렉은 '만약 원작에서 변화를 주려면, 그 내용이 원작보다 훨씬 나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신중히 각색에 들어갔습니다. 1시즌에서 새로운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기존 캐릭터의 새로운 스토리가 추가, 보강된다든가 (103 [long long time] - 게임에서 퀴어임이 암시만 되었던 빌의 캐릭터 백스토리, 107 [left behind] - 게임 확장판과 동명의 에피소드로, 조엘을 만나기 전 엘리의 이야기), 이야기를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캐릭터에 변화를 준 수준이었습니다. (105 [endure and survive] - 조엘 엘리가 우연히 만나는 헨리, 샘 형제 중 엘리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 샘이 청각장애인으로 새롭게 설정됐고 실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역 배우 Keivonn Woodard 가 캐스팅되어 가슴 찡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첫 TV시리즈 캐릭터였는데 그는 이 역할로 에미상 남자 게스트배우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2시즌에서는 각색이 조금 더 들어간 느낌인데, 1시즌과 같이 중요한 장면들은 그대로 살리되 파트2 게임의 줄거리는 많이 생략하고 엘리에서 애비로 서사와 감정을 이동하는 데 공을 들인 듯합니다. 게임이 워낙 유명해서 많이들 아시다시피 파트1 엘리에서 파트2 애비로 게임플레이 캐릭터가 바뀌죠. 그래서 많은 원성과 욕(?)을 먹은 것으로 아는데, 직접적으로 이입/체감하는 게임이 아닌 제3자 시점에서 보는 드라마에서는 대칭점에 있었던 엘리와 애비의 고통 모두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둘이 대치하게 된 상황이 그 둘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고 가슴 아팠죠. (엘리와 애비 둘 다 강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라,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절친이 되지 않았을까..) 크렉은 비하인드 영상에서 '헐리우드에선 흔히 착한 사람/나쁜 사람의 이분법적인 이야기들을 다루는데, 라오어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선 당신이 어느 쪽에 서있든, 화를 낼 정당한 이유가 있다. (...) 우리는 그 끝은 어디인가? 과연 끝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다'라고 했습니다. 애비의 시각으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의도도 여기 있겠죠.
또한 내용상 크렉은 파트2의 내용을 2~3시즌으로 나눠 제작할 생각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사실상 2시즌은 3시즌(애비 역의 케이틀린 디버 Kaitlyn Dever 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즌)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 정도로 볼 수 있을 겁니다. 1시즌 만듦새가 워낙 탄탄하고 그 시즌만으로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2시즌이 좀 낮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전 2시즌도 참 좋아합니다. 특히나 조엘 엘리 스토리의 클라이맥스인 202 [Through the Valley] 는 영화 못지않은 거대한 스케일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여주죠. (에미 받았어야 하는 에피... 억장와르르2)
WAVVE에서 한창 HBO시리즈를 수급했을 때도 들어오지 않아서 (나의) 애를 태웠던 라오어는 현재 1, 2시즌 쿠팡플레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행복...) 닐은 다음 게임 제작 등을 위해 3시즌 제작에서는 빠진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지만 라오어에 대한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사랑만을 갖고 있는 저는 무한 복습하면서 기다릴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