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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숏폼의 시대 느림의 미학

슬로우 번 시리즈 추천

by becky

얼마 전 카카오톡 앱이 업데이트를 했다가 부정적인 이슈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죠. 탭 하나가 숏폼으로 개편된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매체에서 콘텐츠 일을 하고 있지만 저도 자주 듣는 얘기는 이 콘텐츠 중 릴스로 만들 부분이 있는지, 그랬을 때 눈길을 끌 수 있는지입니다. 업계에서 미드폼, 숏폼 등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높았던 것 같은데 직접적인 수익으로 이어지면서 최근에는 숏폼 드라마를 엄청나게 개발하고, 릴스/짧은 클립을 위한 어플이 생기는 등 숏폼 영상은 예전보다 훨씬 친근해진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이 트렌드와 반대되는 작품들을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요, 슬로우 번 Slow Burn 이라 부르는 작품들입니다. 장르를 일컫는 말은 아니고, 이야기의 페이스 조절과 관계있는 단어입니다. 사실 저도 정확히 정의하긴 힘들지만, 시리즈를 아우르는 줄거리에 정확한 기승전결이 드러나기보다 점층적으로, 천천히 물이 끓듯이 긴장감이 더해지는 느낌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느려서 더 아름다운 특별한 매력의 슬로우번 시리즈들을 소개합니다.


<식스 핏 언더 Six Feet Under>
(5시즌 종영, 쿠팡플레이)


체감 속도 ■■□□□

(Six Feet Under = 약 1.8m 아래, 전통적으로 관을 묻는 깊이로 죽어 묻혔다는 의미를 주로 농담으로 할 때 쓰인다고 합니다.)

시리즈는 장의업체를 운영하는 피셔 가족이 일을 하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죽음을 통해 슬픔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습니다. 그들은 한없이 우울하고 사사건건 부딪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매 회 그들이 다루는 죽음을 보면 웃음이 납니다. (헛웃음에 가깝긴 합니다) 죽음을 가볍게 다루지는 않지만 사고사, 병사, 돌연사, 살인 등 정말 이렇게까지 죽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죽음을 보여주면서 삶이란 대체 뭘까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피셔 가족과 그 파트너들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동성애, 종교, 정치, 철학 등 다양한 주제와 함께 펼쳐지는데요. 5시즌까지 고르게 재밌는 편이고, 특히나 결말은 제가 꼽는 최고의 시리즈피날레입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 American Beauty> 극본을 쓰고 시리즈 <트루 블러드 True Blood> 를 제작한 앨런 볼 Alan Ball 이 <트루 블러드> 직전에 제작한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렉티파이 Rectify>
(4시즌 종영, 왓챠 웨이브 티빙)

체감 속도 ■□□□□

'슬로우 번'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작품 <렉티파이>는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년 만에 무죄를 인정받고 사회로 나온 주인공 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그를 믿고 기다려 준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아직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그를 붙잡아 준 친구도 있었고 그에게 상처를 준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렉티파이>는 출감 후 요동치고 갈등하는 다니엘의 내면을 매 회 시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냅니다. 전제만 보면 꽤나 자극적인 내용이 전개될 것 같지만 그 반대라는 게 참 매력적입니다. 극본과 연기, 연출, 음악 등 모든 부분이 좋지만 특히나 촬영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메리칸즈 The Americans>
(6시즌 종영, 디즈니플러스)

체감 속도 ■■■■□

냉전시대 배경 첩보, 액션물 <아메리칸즈>입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부부로 잠입한 러시아 스파이(케리 러셀 - 엘리자베스 제닝스 역, 매튜 리스 - 필립 제닝스 역) 이야기로, 첩보물답게 매 회 다양한 분장과 화려한 액션, 몰입감 넘치는 스토리가 펼쳐져 독립적인 스탠드얼론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두 사람이 아이들을 낳고 가족까지 이루며 미국에서 느끼는 정체성의 갈등, 바로 길 건너 이웃인 FBI는 물론 같은 편인 KGB요원들과 벌이는 수싸움 등이 여러 시즌에 걸쳐 꼼꼼한 스토리라인으로 펼쳐지고,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여정이 6시즌에 걸쳐 완결성 있게 다루어져서 중간에 끊기 힘든 슬로우번 시리즈이기도 한 것 같아요.

본체와 캐릭터를 넘나드는 그들의 화보 (2014, GQ)

케리 러셀과 매튜 리스는 이 시리즈 촬영 중에 실제 커플이 되었을 정도로 미친 케미를 자랑하는데요. 상반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둘의 극 중 캐릭터도 관전포인트입니다. 케리 러셀은 <아메리칸즈> 이후 <외교관> 시리즈에서 또 다른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빈지워칭으로 추천.


<보잭 홀스맨 Bojack Horseman>
(6시즌 종영, 넷플릭스)

체감 속도 ■■□□□

애니메이션 시리즈 <보잭 홀스맨>은 90년대 시트콤 스타인 보잭이 여러 가지 어려움 - 술, 마약, 섹스 중독 등 단편적인 문제에서부터 우울감, 트라우마 등 - 을 이겨내며 과거의 명성을 다시 찾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헐리우드의 평행세계인 '헐리우'를 배경으로 에이전트, 라이벌, 옛 연인, 자신이 고용한 자서전 대필 작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친구 등 보잭이 그의 주변 인물들과 겪는 수많은 웃픈 일들을 다루는데요. 동물 캐릭터들을 통해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주고 초현실, 비현실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 가족관계, 죽음, 트라우마 등 우리가 맞닥뜨리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너무도 똑똑하게 활용하는 것이죠. 해외 리뷰 중 '당신이 기분 좋을 때 본다면 다운될 수도 있음, 하지만 우울할 때 본다면 당신을 위로해 줄 드라마'라는 글을 봤는데 정말 공감해요. 멜랑꼴리 하고 시니컬한 보잭의 분위기에 맞춰 조금은 담담할 때 봐주시길.

제작자인 라파엘 밥-왁스버그 Raphael Bob-Waksberg 가 제작한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인 <언던 Undone> <투카 앤 버티 Tuca and Bertie> 도 설명이 필요 없는 명작으로, 보잭이 재밌었다면 강추합니다.


<브레이킹 배드 Breaking Bad><베터 콜 사울 Better Call Saul>
(5시즌 종영, 6시즌 종영)

브레이킹 배드: 체감 속도 ■■■□□

베터 콜 사울: 체감 속도 ■■□□□

<배터 콜 사울> 비하인드, 빈스 길리건과 밥 오덴커크

두 시리즈는 너무 유명하지만 슬로우 번의 교과서라 생각하기에 마지막으로 추천합니다. 두 시리즈의 크리에이터인 빈스 길리건 Vince Gilligan이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 캐릭터에 대해 Mr. Chips to Scarface 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TV 보며 간식이나 먹던 아저씨가 무자비한 보스 격의 인물로 탈바꿈한다는 말인데요. 무조건적인 선인이나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그의 시리즈에서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 <베터 콜 사울>의 사울 굿맨의 캐릭터 변화는 스릴 있는 슬로우 번으로 보여집니다.


의상 채도나 소품 등으로 심리 변화를 점층적으로 보여주는 악마 같은 디테일은 물론이고, 긴장감 있는 상황일수록 카메라는 정적이지만 음악과 연출을 이용해 스릴을 주는 빈스 길리건 표 연출까지 눈귀입코(?) 오감을 모두 열고 봐야하는 시리즈입니다. <베터 콜 사울>은 <브레이킹 배드>의 조연인 변호사 사울 굿맨이 주인공인 스핀오프라 자식 격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매력이 비슷한 듯 다르고 특히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브레이킹 배드>에서 월터 화이트의 캐릭터 변화를 선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베터 콜 사울>은 사울이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다 라는 식으로 역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또한 <브레이킹 배드> 타임라인 이후의 인생도 일부 다루고 있어 캐릭터가 다층적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원래 이름 지미 맥길, 가명 진 타코빅까지 세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겹쳐져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집니다. 사울 굿맨 캐릭터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잠시 출연시키고 끝내려고(죽이려고) 했다는데, 1차원적인 사기꾼 변호사를 다층적인 캐릭터로 변화시킨 제작진, 그리고 작가 출신의 배우 밥 오덴커크 Bob Odenkirk의 천재성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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