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너무 길다고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 유독 잠에서 일찍 깼으며 밤에는 좀처럼 눈을 감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실제로 시간을 전부 보낸 다음에야 하루가 끝난다는 사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시간을 죽일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은 시간 죽이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주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나 목적 없는 발걸음은 느리고 흔들리기 마련이라, 도시의 밤거리는 신변에 위협이 되었다. 안전한 공원만 걷다 보니 산책 시간이 대폭 줄었다. 공원에서조차 나는 유독 느리게 걸어 다른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멍하니 바람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편했는데, 노인의 모습을 한 젊은이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홀로 등 떠밀려 걷다가 무릎이 아파 그만두었다.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좋아하는 영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좀처럼 무엇도 듬뿍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24시간을 모두 살아내는 인간만이 인정받는다.
괜히 긴 영화를 찾아보고, 우울에 좋다는 음식을 사 먹고, 쥐어짜내듯 글을 쓴다. 무엇도 별 효과는 없다.
무언갈 욕망하거나, 반대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극도로 피곤한 일이라 나는 곁에 둘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이다.
마음껏 길을 잃는 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므로 관성처럼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그래도 산책의 좋은 점은 있다. 나보다 큰 사람을 만난다. 나보다 작은 사람을 만난다. 나보다 따뜻하게 입은 사람을 만난다. 나보다 가볍게 입은 사람을 만난다. 누군가의 강아지와 길거리의 고양이를 만난다.
햇빛이 내리비치는 완벽한 순간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항상 맨눈으로 바라봐야 더 아름다운 이 광경은 공원이 복지인 이유 중 하나다.
무료함은 외로움이나 우울함과는 다르다. 일단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하면 이런 말장난을 할 여유도 없어진다.
우연하게도 나보다 작은 사람들이(혹은 내가 그저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간다. 건물 사이를 지나는 거인과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
음악은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주입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가사가 없는 음악조차 뇌 속에서 끊임없는 이야기들로 재탄생한다.
(지금 이 공원에서 나보다 느리게 걷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멈추진 않았다.)
초록불 후엔 빨간불이 켜지고, 초록빛 나무 옆엔 흑백의 자동차가 서 있듯, 무료함 후엔 감당하기 벅찰 만큼의 감정이 밀려온다. 그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시간 죽이기다.
평소보다 배는 걸려 산책을 마친 뒤, 시계를 보곤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행히 저녁 먹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