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감각: 여성 교육의 의의

동덕여대부터 응원봉 시위까지

by 진청



여성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복잡한 교육의 역사 같은 건 모른다. 그저 내가 살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 교육의 의의는 여성들에게 ‘참여 감각’을 습득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참여 감각이란 내가 멋대로 만든 말로, ‘목소리를 내어도 된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는 사회 참여와 개입, 연결의 감각을 뜻한다. 정치 효능감과 유사하지만 조금 더 일상과 밀접하다. 여성 교육이 확장되면서 이 감각을 체득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의제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동덕여대 공학반대 시위와 반여성주의 대통령 윤석열 탄핵 시위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현상도 오랜 여성 교육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올가미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한 하나의 목소리로 인정받는 경험, 그것은 내가 여대에서 얻은 가장 큰 보상이기도 하다.


남녀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다르다. 예로부터 남녀의 목소리가 갖는 힘은 1.5:0.5 정도로, 남성의 목소리는 하나하나 귀중하게 여겨지는 반면 여성의 목소리는 여럿이 모여야 겨우 ‘여자들이 뿔났다!’, ‘여대생들의 당찬 외침!’과 같은, 오로지 여성과 아이에게만 쓰이는 말로 소개되었다. 그래봐야 인정받는 ‘목소리의 수’는 모인 인원의 1/10 정도다. 수학적 오류 아니냐고? 맞다. 0.5짜리 목소리가 30이 모이면 분명 15명분의 목소리는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3이었다. 이는 목소리를 듣는 귀 역시 편향적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바꿀 힘을 가진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 등의 권력 계층은 내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도 절대다수가 남성이다. 이들이 자신과 같은 남성의 목소리, 남성의 문법을 더욱 잘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이 자유로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무시당하는 것을 넘어 공격받고, 낙인찍힐 위험이 있는 곳에서 약자는 그저 숨죽일 수밖에 없다. 목소리를 내어도 '나댄다', ‘독하다’ 등의 멸시 섞인 말만 듣게 될까 봐.


여자 대학은 위축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기에 가장 좋은 ‘비밀 공간’이다. 나는 일평생 극도로 내향적인 인간으로 살아왔고, 토론 수업은 기를 쓰고 피했으며, 대학에서 그 흔한 동아리 하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불성실한 청춘의 대표주자인 나조차 학교 안에서, 학과 안에서, 교내 커뮤니티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를 냈다. 그 내용은 학교 운영이나 강의, 교수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고, 세상사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기도 했으며, 연애 상담이나 생리대, 맛집 추천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어떤 이야기든 간에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학우들은 교내 커뮤니티에서 돌던 이야기를 강의실에서도 했고, 대자보가 붙은 게시판 앞에 서서, 학식을 먹으면서 큰 소리로 한참 토론했다.

물론 모든 주장이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반박과 비난을 주고받으며 매우 길고 피곤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누구나 ‘1’의 가치를 지닌 목소리로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여자 대학에서 페미니즘이 꽃필 수 있었고, 성소수자, 장애인, 빈곤, 환경 등 교차성을 논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수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런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있다. 공학 대학을 나온 여성이라고 전부 위축되어 있고 목소리 내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유난스럽고 시끄럽고 예민하다’는 말을 듣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여자 대학의 가장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비밀 공간도 알아볼까? 그만 알아보자...


내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여대에 간 것은 아니다. 뛰어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수능 성적으로 나름대로 원하는 학과에 가기 위해 고른 서울권 대학 중 이곳에 합격했을 뿐이다. 같은 ‘급’, 같은 학과의 남녀공학에도 합격했지만 여대를 선택한 것은 그저 공학 대학의 과 페이스북 페이지 맨 위에 있던 MT 사진 때문이다. 노란 장판이 깔린 어두운 방에 소주병과 과자 봉지가 널려있고 남녀가 ‘짝’을 맞춰 줄무늬처럼 번갈아 앉은 모습. 난 그런 공간엔 있고 싶지 않았다. ‘여자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모순되게도 여자 대학에 가야 했다.

여대에도 노란 장판 MT는 있었지만, 신입생 OT 빼곤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이것이 여대의 보편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여대에선 개인의 공간을 잘 침범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기적이라거나 차갑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이기심이 아니라 경계심이며, 그 경계심에서 우러나온 배려심이다. ‘관여받지 않을 자유’는 한국의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여성으로서는 느끼기 힘든 자유다. 여기저기서 치이던 여성들은 그들만의 공간인 여대에서만큼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대가 성녀의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해방의 공간이다.


출처: 트위터

현대에 아무리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권력 계층의 비율이 늘어났다고 해도 아직 모자라다.(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을 참고하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자 대학의 공학화, 여자 대학의 폐지를 논할 수 있으랴. 동덕여대와 성신여대를 공학화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업생임에도 큰 위협을 느꼈다. 페미니스트들이 궁극적 목표로서 페미니즘 소멸, 여자 대학 소멸, ‘여성’가족부 소멸을 외친 것은 여성이 한 인간, 한 목소리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미래를 상정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러한 평등의 ‘궁극’이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물며 그 과정에서 재학생들과의 논의 없이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다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기를 의무가 있는 여성 교육 기관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지금 더욱, 여성에겐 비밀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위에 나온 젊은 여성들을 호명하는 공적 매체와 정치인들이 놀라우면서도 씁쓸하다. 젊든 아니든 여성의 목소리는 언제나 있었다. 늘 ‘당찬 저항’으로 과소평가되었을 뿐. 정치에 관심 있는 여성을 보지 못했다는 말은 지금도 현장에서 목 놓아 외치고 있는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말이다. 동덕여대 학생들은 성북구에서 공학 전환 반대 시위를 하고 저녁엔 여의도로 달려왔다. ‘이 여성’과 ‘저 여성’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의 목소리는 정치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이번 시위에서도 응원봉으로 대표되는 젊은 여성이 ‘눈에 띄게’ 많았기 때문에 통계 속에서 1인분의 목소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 눈에 띌 정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또다시 축소되었을 것이다. 내 옆에 있던 중장년, 노년층 여성들이 그러했듯. 언론과 정치인이 탄핵 성공과 다가올 대선만을 위해 굽실거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뒷받침할 근거는 무섭도록 많다. 이제는 이 의심을 종식해 주어야 할 때이다.


목소리를 내도 좋은 공간에 가면 우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실제로 젊은 여성이 많았다는 기사를 보고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여자 친구들이 많았다. 나 역시 시위 현장에서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페미니스트, 장애인, 성소수자의 자유 발언에 목청껏 호응할 수 있었다. 비교적 안전한 이번 시위 현장에서 많은 여성들이 참여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씁쓸한 이유는 이러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대’에 시민들은 20년째 장애인 이동권, 차별금지법을 외치고, 전국에서 산업재해와 파업이 반복되고, 혜화역에서 여성혐오 근절 시위가 이어지고, 세월호, 이태원 등 참사 유가족들은 애도를 마치기도 전에 재발 방지법을 촉구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축소되고, 묵살되었다. 목소리가 작다고 하여 확성기를 들고 ‘안전하지 않은’ 길거리로, 지하철로, 광장으로 나왔으나 때가 아니라는, 개인의 일은 정책이 될 수 없다는 더 커다란 목소리에 파묻혔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회를 어찌 민주 사회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작은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들에게 어찌 민주 사회의 권력을 맡길 수 있겠는가. 마스크와 방독면, 손바닥에 입을 가로막힌 이들이 어찌 참여 감각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나는 더 많은 이들이, 특히 더 많은 여성들이 참여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 비밀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광장에서도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인정받고, 다른 소수자의 목소리를 하나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디 또래 남성들도 자신만의 목소리로 그곳에 존재하길 바란다. 이준석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이 남성 전체의 목소리를, 당신의 목소리를 대표하도록 두지 말아 달라! 나는 그 시작이 당연하게도 여성 교육에, 더 나아가 여성주의 교육에 있다고 본다. 여성이 권력 계층의 과반을 차지하고,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1인분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될 때, 나는 비로소 페미니즘과 여자 대학이 소명을 다했다고 말할 것이다.



사진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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