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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송 Dec 24. 2024

올 크리스마스엔 케이크라도

벨 아줌마의 트라이플이 생각나는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 조각은 나 홀로 집에, 커다란 과자선물상자,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여있던 선물. 불교인 우리 집에선 큰 의미가 없는 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는 자식들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으셨나 보다. 우리 셋 중에 가장 감성 적였던 나는 나 홀로 집에, 엘프, 34번가의 기적 같은 크리스마스 영화를 좋아했고 어딘가에 산타클로스가 있을 거라 믿었다. 나의 버킷 리스트엔 아직도 핀란드의 로바니에미가 적혀있으니까. 평소엔 정말 보기 힘든 과자종합선물세트가 집에 오면 언니 나 남동생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부터 먹고 싶은 걸 하나씩 고르는 규칙이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최대한 공정하게 나누었다. 하지만 나눌 때 그때뿐. 먹을 땐 세 개의 손들이 서로의 과자를 오가며 무척이나 바빴다. 그럴 거면 왜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티비에서 하는 '나 홀로 집에'를 보면서 산타를, 아니 산타의 선물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다 일찍부터 외국에 대한 로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는 집과는 다르게 차고까지 딸린 그림 같이 예쁜 집. 반짝반짝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 있고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린다.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 옆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주위엔 선물들이 한가득 쌓여 있는 풍경. 식탁엔 커다란 칠면조가 먹음직스럽고 그 옆엔 빵과 샐러드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있다. 어, 저 케이크는 우리 동네 제과점에서 파는 거랑 좀 다르네. 어린 내 눈엔 영화의 스토리 보다 저쪽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뭘 먹고 사는지 그런 게 더 들어왔고 더 궁금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꿈꾸었던 거 같다. 완전 다른 세계,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참 많이 했다.




대학교 때 2학년 2학기를 캐나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공항. 아주 큰 비행기. 어렸을 때 봤던 그 화면 속 세상으로 들어가는 신비한 통로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캐나다. 영화처럼 맞이한 나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내가 있었던 캐나다 시골은 겨울이 아주 길고 눈이 많이 내렸다. 영국에서 이민을 온 벨 아줌마는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잘 아셔서인지 나를 딸처럼 이뻐해 주시고 때로는 친구처럼 아껴주셨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함께 트리를 꺼내 장식하고 잘 안 쓰던 벽난로를 청소하고 장작불을 지폈다. 추운 겨울밤 벽난로 앞에서 쉐리주를 따라 마시다 에밀리와 나는 진저브레드로 과자집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는 연인들 또는 친구들이 모이는 날이었지만, 캐나다의 크리스마스는 철저히 가족과 함께였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이면 오븐에는 칠면조가 구워지고 집안은 구수한 그레이비 향이 가득 찼고 냉장고엔 에그녹과 아줌마가 만드신 트라이플 디저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노먼 가족이 되어 아줌마 데이브와 에밀리 옆에서 크리스마스 저녁 만찬을 즐겼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트라이플은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과일로 만든 디저트이다. 셰리 또는 와인에 담근 스펀지케이크나 커스터드 케이크와 휘핑크림, 그리고 젤리 등을 교대로 복층으로 올려쌓은 형태다. 과일 및 스폰지층은 과일향 젤리와 혼합되기도 하는데, 이들 성분은 보통 3~4개의 층을 생성하도록 배열된다.  쉽게 말해 와인 같은 주류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와 크림, 젤리 등을 교대로 쌓은 다음 과일 등을 곁들여 만든 음식이다.
                                                            - 나무위키


트라이플 - 나무위키


트라이플은 티라미수처럼 층층이 쌓인, 떠먹는 케이크다. 커피 대신 술에 적셔진 스펀지케이크가 베이스. 처음 트라이플을 먹었을 때는 이게 무슨 맛이지 내 표정이 오묘해졌다. 쉐리 향이 강했다. 크림보단 술맛이 더 나는 디저트는 처음이라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줌마도 예상하셨다는 표정으로 웃으신다. 알코올향이 강할 수 있으니 억지로 다 먹지 않아도 된다고 배려해 주신덕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남겼다. 하지만 교환학생으로 다시 돌아가 아줌마와 맞이하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에는 달랐다. 트라이플을 한 접시 뚝딱 해치웠다. 그동안 아줌마와 마셨던 쉐리주가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그 사이 내가 어른의 입맛이 된 걸까. 신기하게 맛있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냉장고에 남아 있던 트라이플을 한번 더 떠먹었음 말 다했지. 캐나다에서 동화 같은 경험을 한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전과는 좀 달라졌다. 떠올릴 추억이 생겼고 그건 특별한 의미였다. 더 이상 영화 속에만 있던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으니까.




비행을 하게 되면서 수많은 곳에서 다양한 방식의 크리스마스를 만났다. 크리스마스부터 연말까지는 항공업계에선 그야말로 피크 시즌이다. 그래서 3년에 한 번씩만 크리스마스에 휴가를 신청할 수 있는 규칙도 있다. 가톨릭 신자였던 룸메이트 킴은 가족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늘 그리워했지만 나는 외롭게 두바이에 남아있기보단 일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 자진해서 방콕-시드니-크라이스처치 7일짜리 긴 비행을 가기도 하고 15시간이나 걸리는 브라질 상파울루로 날아가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날은 다 문을 닫는 유럽으로 비행을 가서 호텔에만 꼼짝없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12월 스케줄에 유럽 비행이 나오면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글루와인을 마시고 슈톨렌도 먹고 파네토네도 먹었지만, 어디에 있든 나는 캐나다의 크리스마스와 벨 아줌마의 트라이플이 가장 그리웠다.



왼쪽부터 슈톨렌 파네토네 파블로바



호주에서 살면서는 총 네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해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베큐를 하기도 하고 유명한 발레리나 이름을 딴 호주 디저트 파블로바를 먹기도 했지만 무더웠던 호주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큰 울림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나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는 추운 겨울의 따뜻한 크리스마스다. 여기 한국에는 아줌마의 칠면조도 쉐리주를 듬뿍 적셔 만든 트라이플도 없다. 하지만 나에겐 아줌마가 만들어주신 추억이 있고 내가 추억을 만들어 줄 아들이 있다. 매년 12월이 되면 아들을 위한 선물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포장을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 트리에서 선물을 발견한 아이의 행복한 표정과 웃음에 엄마의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진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아들은 생뚱맞게 크리스마스 음식으로 떡볶이를 주문하고 학교에 갔다. 칠면조 대신 빨간 떡볶이를 만들고 트라이플 대신 같이 케이크를 사러 갈 거다. 셋이 각자 먹고 싶은 케이크를 하나씩 골라서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며 나눠먹어야겠다. 아, 벨 아줌마에게 메일도 보내야지. 또 한 번 아줌마의 쉐리 트라이플을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는 기적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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