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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Feb 23. 2022

전라도 이주민 2세대

땅과 언어 이주민의 삶

2021년 봄, 내 아버지의 고향 전라남도 담양에 부모님과 함께 다녀왔다.  심장병으로 대수술을 하시고 생사의 고비를 넘긴 아버지는 더 늦기 전에 선산에 가고 싶어 하셨다. 나도 왠지 꼭 그래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전남 담양군 금성면 외추리 350. 아버지가 나고 자란 동네이며 아버지 위로 4대가 대를 이어 살던 작은 집성촌이다. 드넓은 담양 평야의 한 구석 깊은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너무 외지고 가는 길이 험해 6.25 때 인민군도 국군도 오지 않았다 한다.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백발이 성성하신 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선산에 오르셨다. 당신의 아버지 무덤에 다다르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 다시 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아버지 눈물이 마스크를 적셨다. 아버지의 고향. 나에게는 그냥 어렸을 때 몇 번 와본 답답한 산골마을이었으나, 수백 년 전 나의 근원이 이 산골짜기에 있었다는 것을 음미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고향이라고 할 만한 지역이 딱히 없다. 48년을 살았는데 어느 한 지역에서 10년 이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 이렇게 보니 지독한 역마살인 것 같지만 나는  대체로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유년기를 살았던 곳을 다들 고향이라고 하던데 나는 태어나기는 경남 김해에서 났고 얼마 안 되어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와 8살 까지 살았다. 다시 전남 광주에서 3년 대구에서 3년을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다. 조각조각 흩어진 유년시절의 기억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고향은 없고 그냥 재미나게 이사 다녔던 기억,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꼬마였을 때 일이다. 우리 집은 경기도 의정부였는데, 엄마를 따라  명절을 지내러 전라도 광주 큰외삼촌 댁을 방문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분명 한국말인데 나는 친척들이 하는 말을 반 밖에 이해 못 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엄마가 하는 말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 경기도 말과 전라도 말은 많이 달랐다. (나는 '사투리'나 '표준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는 특정 지역과 계층의 이익을 편파적으로 대변한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뒤에 내가 억양과 말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영국에 갔을 때도 영어는 서툴렀지만 계층과 지역에 따라서 말과 억양이 달라지는 게 흥미로왔다. 스코틀랜드 에버딘에서 온 친구의 스코티쉬 억양이 마치 전라도 말처럼 정겹고 듣기 좋았다. 물론 잘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렇게 친정에서 유창한 전라도 말을 구사하시던 엄마는 다시 의정부로 오셔서 감쪽같이 경기도 말로 바꾸셨다. 나는 다시 내 엄마를 찾은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이후로도 엄마는 이모들과 전화를 하실 때, 외할머니가 놀러 오셨을 때 유창하게 전라도 말 실력을 보여주시곤 했다. 한참 지나서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경상도에서 온 사람들은 말을 그다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라도 말을 쓰는 것은 서울에서  좋은 인상을 주지 못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역감정이 극에 달하던 80년대 90년대였다. 그래서 나도 누가 물으면 내 고향은 경남 김해라고 적당히 말하거나 아님 내 유년기 기억의 시작인 의정부라고 둘러댔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경기도 태생으로 알고 있다. 

내가 광주에 살았던 기간은 고작 3년 이기 때문에  나는 전라도를 잘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라도에서 온 이주민 2세대라는 정체성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 2세대나 유태인 2세대만큼 강한 정체성 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그들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 같다. 전라도 말을 쓰는 것을 되도록 감춰야 했던 부모님의 무의식적인 긴장을 나도 이어받았다. 내 부모님은 밖에서는 평범한 수도권 시민으로 살다가 집에서는 해태 타이거즈를 열렬히 응원했으며 김대중 선생님을 향해 신앙과도 같은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서러움과 차별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우연히 부산과 창원 목포와 여수 등 영남과 호남의 도시들을 차례로 여행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 깊은 지역 차별을 눈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강의를 할 때면 나는 서울 중산층의 말을 유창하게 구사한다. 거기에 더해 영어회화까지 가능해서 나의 언어 구사능력은 남한 사회의 언어의 서열 꼭대기 즈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 중산층의 말은 내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언어였고 나도 그렇게 전략적으로 취득한 언어이다. 나의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나의 말은 어디쯤에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주민 2세대는 그래도 1세대와 다른 면이 있다. 전라도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분명 하나 나의 심장은 광주에도 경기도에도 없다. 그 어느 중간 즈음에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난 이방인 같은 기분으로 산다. 지역에 소속감도 없고 뿌리에 대한 강한 애착도 없는 삶이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실리적이고 건조한 자세가 있다. 저 건물이 있던 터는 어땠고, 이 길 지나서는 원래 어떠했다는 토착민들의 땅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난 내가 이방인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소외와 긴장을 자극하는 말들이다. 이주민들이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디에 가면 물건이 싸고 어느 의원이 믿을만하다는 실질적인 정보가 다급하고 궁했다. 아마도 그것이 이주민의 정서인 것 같다. 


토착 원주민 혹은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각종 미디어 콘텐츠나 문학작품 그리고 정치적 발언들은 확실히 많다. 땅을 사랑하고 애착을 갖는 자세는 어딜 가나 온당한 갑의 지위를 갖는다.  

그에 비해 이주민의 삶과 역사는 많은 경우에 을에 해당한다. 내가 성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유목민, 나라를 잃고 강제 이주당한 실향민들의 이야기가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해서 그렇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떠나야 했던 사람들, 지금도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은 한국에, 지구촌 곳곳에 여전히 많다. 그들의 고단한 삶에 연대하는 마음을 담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정착민이 되기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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