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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Feb 28. 2022

개근하지 말걸 그랬어...

     

3월이 되면, 긴긴 겨울 방학을 마친 아이들이 다시 아침 9시 즈음 떼 지어 종종걸음으로 학교 정문을 향한다. 늦었다고 폴짝폴짝 뛰어가는 초등학생,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모든 불만을 다 담은 얼굴로 걸어가는 중학생까지 예쁘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시간에 맞춰서 당연하다는 듯 학교를 가는 아이들 모습을 볼 때면, 등교와 출석일수 때문에 얼굴에 한가득 근심을 담아 상담을 받으러 오시던 어머님들이 생각난다. 아이가 좀처럼 학교에 가질 않는다면서 제발 출석일수 채워서 졸업이라도 정상적으로 했으면 한다는 간곡한 당부가 떠오른다. 아이가 학교에 가질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타실까. 그러나 또 한편으론, 학교가 뭐 길래 이렇게 출석하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일까?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제시간에 학교를 가고, 결석을 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되었을까? 이야기치료(Narrative Therapy)에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믿음과 신념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필요한 경우 이것을 해체하도록 돕는다 (Pare, 2013). 나의 신념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형성되었는지 다시 따져보고 불필요하거나 부당하다면 해체해서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실은 나도 초. 중. 고등학교 12년 개근이다. 당시엔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감기몸살이 심하게 걸려 잘 걷지 못하는데도, 엄마는 나를 택시에 태워서 학교에 같이 가신 다음 바로 조퇴 처리를 하셨다. 출석은 그만큼 중요했다. 그 뒤로 나는 어지간하면 결석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보면, 근대식 학교 교육은 산업화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어림잡아 200여 년 정도의 역사가 있고 우리나라는 그 보다 짧게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근대식 학교 교육이 들어왔다. 교육의 혜택이 다수에게 돌아간다는 긍정적인 면이 분명 있으나, 근대식 학교 교육은 간단한 연산 능력과 문해력을 갖춘 훈련된 공장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필요로 했던 산업자본의 요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어쩌고 하면서, 단순노동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학교 붕괴라는 말도 같이 회자되는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교육은 어땠을까? 상업과 공업은 물론 인문, 사회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은 철저하게 도제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즉, 스승으로부터 그 지식과 삶을 배우는 것이 수천 년을 이어 온 보편적인 인류의 교육 방식이었다. 실은 이 도제 시스템은 예체능계에서는 아직도 활발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출석하고 수업을 듣고 시험 봐서 적당한 때에 졸업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은 아니다. 선생님을 만나서 그 선생님으로부터 삶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교권이 땅에 떨어진 요즘의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학교라는 시스템은 어찌 될지 모르나, 스승은 없어지지 않는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안녕과 성장을 기원하는 훌륭한 스승들은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것이다. 아이들에게 스승을 만나도록 하자. 교실에 들어서면, 꼭 눈을 마주치고 선생님께 인사하도록 해 보자.


참고문헌: 

Pare, D. A. (2013). The Practice of collaborative counselling & psychotherapy: developing mindful helping. SAGE Publication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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