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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니바람 Feb 11. 2020

#6. 연구계획서와 추천서

<지방대 박사 생존기>


1월 29일부터 2월 10일까지, 13일 동안 연구계획서를 치열하게 작성했다. 오랜만에 한 가지 일에 열중해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취침-기상-연구계획서 작성-점심-다시 작성-저녁-휴식의 일상을 반복했다. 온전히 작성만 한 시간이 13일이었지, 선행연구를 검토한 시간을 더하면 거의 한 달간은 여기에만 매달렸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연구요약을 쓰던 지난 일요일 저녁, 그 뿌듯함과 성취감이란. 선정여부와는 관계없이 무엇인가를 하나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끝냈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처음에 고민했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듯,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나니 신기한 감정까지 들었다.      

 

나 스스로도 웃기지만,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어떤 연구를 하겠다는 것인지 그 방향을 명확하게 잡지 못할 때가 있다. 대부분의 연구계획서가 가진 흔한 문제 중 하나도 명쾌하지 않은 연구목적이기도 하다. 연구목적은 정확한 선행연구검토와 이론적인 문제의식과 더불어 내가 알고자 하는 현상에 대한 이해가 적절히 버무려질 때 명확하게 도출될 수 있다.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         


사실, 박사학위논문을 마무리한 이후 처음 써보는 연구계획서여서 그런지 많은 부담을 느꼈다. 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작성하는 연구계획서가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지도교수님께도 검토를 부탁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항상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검토 받는 일은 엄청난 긴장을 유발한다. 엄청나게 많은 군중의 시선을 이 한 몸으로 다 받아내야 하는 그런 긴장감.      


다행스럽게도, 연구계획서에 대한 지도교수님의 코멘트는 좋았다. 내가 세운 이론적인 틀이나 연구목적에 흥미로워하셨다. 이제 조금 더 수정하고, 14일부터 온라인에 탑재를 하면 지원이 시작된다. 문제는 추천서이다. 내가 졸업한 대학 소속으로 지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타 대학 소속인 교수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려야한다. 지금 내 고민은 여기에 있다.      


추천서와 교수의 권력


프로그램에 지원하려면 추천서가 2부가 필요하다. 지도교수 추천서와 지도교수가 속한 학과장의 추천서. 이미 박사를 졸업했지만 이 프로그램 자체가 ‘연수’라는 명칭을 달고 있어서인지 추천서는 구비해야하는 증빙서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추천서를 받아본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부탁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수업하고 연구하고 이런저런 행정처리를 하느라 바쁜 교수들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는 게 쉽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의 지도교수는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알아서 잘 도와주고는 하셨다. 문제는 다른 대학의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는 것. 지도교수가 연결해준 분에게 추천서를 작성해주겠다는 확답은 들었지만, 그 이후 내가 여러 번 연락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답이 없으셨다. 전화 세 통, 카톡 한 번. 카톡은 그래도 읽으셨는데 전화에는 답이 없다. 한 번은 회의 중이셨던 것 같고, 두 번은 통화 중이셨다. 다시 전화를 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카톡에도 답이 없었다.      


이전에도 교류하던 교수님이어서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연락이 잘 닿지 않아서 이상하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인간적으로도 기분이 썩 좋지도 않았다. 현실적으로 그분에게 내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겠지만, 이렇게까지 연락이 되지 않을지는 몰랐다. 어떤 일이든 미리미리 처리하는 게 속이 편한 내가 14일부터 탑재를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추천서를 어떤 식으로 받을지 정리하지 못했다. 

  

워낙 바쁘신 분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실제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 켠은 아리다. 그러면서 아무리 연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그렇지, 이미 박사까지 한 사람들에게 추천서를 요구하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외국의 박사후연수는 많을 때는 세 사람에게까지 추천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이런 추천서가 이미 대학에서 막강한 교수의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추천서를 대체할만한 것이 없는지 의문도 든다. 내가 공부한 학문은 교수들이 그나마 다른 학문에 비해 권위적이지 않고, 수평적인 관계를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지만. 교수들을 극진히 대우해야하는 학문들의 경우에는 추천서 하나에도 많은 고려가 필요하다. 김영란법으로 예전에 비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암암리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불합리한 일들이 추천서와 무관할 거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대학은 생각보다 깨끗하지 않다. 온갖 비리들이 넘치고, 그것을 덮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제도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추천서도. 심지어 어떤 대학은 교수임용에도 추천서를 구비하도록 요구한다. 최근 임용에 지원하려던 어떤 지원자가 지도교수에게 추천서 작성을 부탁했는데, 지도교수는 또 다른 제자 중에 본인이 밀고 싶은 제자에게 추천서를 써주어야 한다며 거절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추천서는 실제로 지원자의 능력을 검증하는데 활용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추천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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