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월입니다. 날씨의 변화, 계절의 변화가 없다 보니 신체시계도 오류가 난 모양입니다. 시간이 이렇게 쏜살같을 수 있는지 한국보다 더 빠른 것 같아 태국에서는 더 부지런히 시간을 아껴가며 살아야겠습니다. 이곳은 변화 없는 무더운 날씨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방콕의 1월과 2월은 정말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말 그대로 건기입니다. 하지만 건기지만 결코 건조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습도로 한낮에는 여전히 33~34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저의 일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장기 휴가를 다녀와 다시 오픈한 피난처 카페에서 떠오르지 않는 글감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목차 수정만 2주를 넘기다 보니 머릿속으로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뇌가 메말라 버리는 느낌입니다. 이곳 피난처 카페도 장기 휴가 탓인지 기존 보다 손님이 줄어들어 카페 사장님의 가슴 속도 메말라 무너져 어깨가 더 처져 보입니다.
이럴 때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매일 익숙하게 먹고 마시던 머릿속 똑같은 메뉴는 접어두고 처음으로 피난처 카페의 메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카페 메뉴가 미슐렝 빕 구르망 식당처럼 샐러드, 스타터, 메인, 디저트까지 구성이 알찹니다. 앞으로는 이 메뉴를 매일 하나씩 모두 맛봐야겠습니다. 오늘은 아침도 먹지 않았기에 음료는 커피보다 타이 밀크티로, 식사는 토스트보다 덮밥인 깽쏨 쁠라를 주문해 봅니다.
타이 밀크티는 마차 라테와 비슷하지만 진한 오렌지 색에 쌉싸름한 맛이 마차보다 연하고 바닐라 향처럼 잔잔한 허브 향이 입안에 남습니다. 단맛이 싫어 시럽을 추가하지 않았지만 타이 밀크티는 약간 달달하게 마시는 게 쌉싸름한 맛을 부드럽게 넘겨주는 것 같습니다. 방콕에 와서 더위에 지쳤을 때 마차라테나 카페라테보다 달달한 아이스 타이 밀크티 한잔이 회복에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깽쏨 쁠라. 메뉴판의 영문이름은 Sour Curry with Fried Fish Over Rice, 대충 해석해 보니 신맛 나는 카레에 튀긴 생선을 밥 위에 뿌려주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Sour Curry는 못 먹는 셈 치더라도 튀긴 생선과 밥은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주문을 했지만...
이름도 낯선 깽쏨 쁠라는 맵고 신맛이 나는 생선 카레입니다. 사실 깽쏨 쁠라가 이렇게 맛있을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먹었던 돼지고기 덮밥(Honey Roasted Pork over Rice)이 최고라 알고 있었지만 피난처 카페에 나오는 깽쏨 쁠라가 편견을 깨뜨려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생선살 튀김이 초라합니다. 태국의 카레는 우리가 생각하는 맵고 달달한 인도식 노란색 카레가 아니었습니다. 피난처 카페의 깽쏨 쁠라는 어탕과 김치찌개를 섞은 매콤, 달콤, 시큼함이 생각나는 한국적인 맛입니다.
생선 튀김을 한입크기로 크게 잘라 깽쏨 쁠라에 적셔 한입에 넣으니 바삭하고 고소한 튀김에 깽쏨의 맵고 달달하고 시큼한 맛의 조화가 환상적입니다. 요즘 미슐렝 가이드를 열심히 분석하고 있지만 과연 미슐렝 가이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집 가까운 카페에서 파는 85밧(3,500원) 짜리 음식이 이렇게 훌륭한데 말이죠. 태국은 음식의 천국입니다. 하지만 블로그와 영상으로 맛집을 찾아가는 것보다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위생적인 음식점에서 맛보는 것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유명 맛집보다 저렴하고 조용하게 음식에 집중하며 맛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다양한 음식을 맛보려고 했던 다짐이 피난처 카페의 깽쏨 쁠라 덕분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습니다. 행복한 고민이지만, 카페에서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해내는 방콕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