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매일 비가 온다. 오후 2~3시쯤 비가 내리지만 그래도 즐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많아진 것. 직장생활을 하면서 쉽게 병행할 수 없었던 가족들과의 시간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 요즘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이다.
태국에서 맞이하는 작은아이의 첫 생일 아침을 거창하게 차려주고 싶었지만 어제 오후에 내린 폭우로 길이 침수되다 보니 케이크도 하나 사지 못했다. 결국 집에 있는 재료로 부랴부랴 준비한 3가지 메뉴가 끝... 냉동 새우살에 미역과 다시마, 국간장, 멸치액젓으로 간을 맞춘 미역국, 한국 두부가 없어 비린맛 나는 현지 두부에 간장, 참기름, 설탕 소스를 올린 두부구이, 계란 조미 김말이와 갖지은 흰쌀밥이 고작이다.
조촐한 생일상이 미안해 오늘 먹고 싶은 저녁 메뉴를 물어보니 고민 않고 초콜릿 케이크라 말하는 작은 아이. 평소에 먹어보지도 못하는 비싼 케이크를 마음껏 먹어보도록 오늘 저녁식사는 큰마음먹고 호텔 뷔페로 예약을 잡아 본다. 태국의 호텔 뷔페는 평일 할인을 받으면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케이크가 많은 호텔 뷔페로 예약하니 집과 거리가 제법 멀다.
요즘은 거의 매일 오후 3시부터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하며 비가 온다. 비가 많이 오면 방콕 전체가 침수되기 때문에 외출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늘 오후의 날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김없이 오후 2시, 전쟁이 난 것처럼 저 멀리 '쾅쾅' 대포소리처럼 들려온다. 대문 앞 종소리도 '딸랑딸랑' 울리 시작하며 곧 비가 오나 걱정이 된다. 비가 오더라도 폭우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오후 3시 천둥소리는 계속되지만 다행히 폭우가 올만한 비구름은 아니다. 과연 작은아이는 오늘 저녁에 원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나는 뽑기 운이 없지만 아내는 상대적으로 나보다 뽑기를 잘한다. 나는 꼼꼼한 성격 탓에 신중히 선택하고, 아내는 털털한 성격으로 대충 뽑지만 언제나 '꽝'은 나의 몫이다. 작은아이의 뽑기운은 과연 나를 닮았을지 아내를 닮았을지 오늘의 운은 작은아이에게 걸어본다.
아이들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아직까지 하늘은 별다른 비 없이 잘 견뎌주고 있다. 뷔페 예약시간은 저녁 6시. 시내에 있는 호텔까지 출퇴근 시간에 맞춰가기 위해서는 최소 2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하지만 비가 올 듯 말듯한 하늘을 보며 오후 5시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다행히 오후 5시까지 비가 내리지 않자 택시를 불러 예약된 뷔페로 향한다. 예상처럼 퇴근 시간과 겹쳐 목적지 근처에서 차가 움직이지 못한다. 그때 택시 유리창에 한 방울씩 물방울이 떨어진다. 예약시간보다 30분이 늦은 터라 비가 더 오기 전에 택시에서 내려 서둘러 이동했다. 무사히 뷔페에 도착하니 그제야 어두운 하늘 주위로 번쩍번쩍 플래시가 터지며 천둥 같은 박수소리로 축하해 준다.
작은아이의 운은 아마 아빠와 엄마의 뽑기운을 반반 받은 모양이다. 자리를 배정받은 코지한 뷔페 창가에서 바라보는 방콕도심의 저녁 풍경. 평소에 무시무시하던 번개와 쏟아지는 비가 왜 이리 낭만적으로 보이는지.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오늘 저녁도 어김없이 침수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만만치 않겠지만 오늘은 태국 와서 몸과 마음을 고생하고 처음 맞이하는 작은아이의 작은 생일이기에 진심으로 축하해야 할 저녁이다. 지긋지긋하던 번개와 폭우, 교통체증마저도 아름다운 방콕의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