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미작가 Mar 27. 2020

시외할머니의 부고

시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남편의 외할머니, 시어머니의 어머니. 향년 백 삼세. 


사람들은 시외할머니의 연세를 듣고 "와, 오래 사셨네."라고 했다. 분명 긴 시간이다. 하지만 자식들에게도 그럴까. 자식들은 그래도 조금만 더 곁에 계셔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Image by ahuz from Pixabay


아흔이 넘고도 혼자서 지팡이 짚고 10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하지만 한번 크게 잘못 넘어져서 병원 치료를 받으신 후로는 거동이 불편해지셨고, 자식들도 그런 어머니를 혼자 생활하도록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도 많이 늙었다. 첫째 아들은 일흔이 넘었고 막내딸은 예순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식들이 기간을 정해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아주 어렵게 의견이 모였다.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 거동이 조금 불편하다 뿐이지 정신이 아주 맑은, 특별히 편찮으신 곳이 없는 분을 요양병원에 모신다는 것은 마치 新 고려장처럼 느껴지는 일이어서 온 가족들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놓았다. 


시외할머니는 꽤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계셨다. 백 세가 다 되어서도 좋은 로션을 바르고 싶어 하시고 빗질하지 않은 머리를 부끄러워하셨던, 곱고 곧은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두해 전부터 조금씩 정신이 흐트러지셨다. 자꾸 물건을 잃어버리셨고 같은 내용의 전화를 몇 번이고 하신다고 했다. 누가 자꾸 자기 물건을 훔쳐 간다고 의심했고 집에 가고 싶다고 아이처럼 떼를 쓰신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시외할머니의 막내딸, 나의 시어머니는 우셨다. 답답하고 서글프고 애달파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울고 또 우셨다.


그런 시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하필이면 이 때다. 코로나 19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이때에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장지는 대구였다. 목소리가 꽉 잠긴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애도를 표현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하셨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라고 하시고는 목이 메시는지 낮고 깊은 한숨을 쉬셨다. 그 말의 무게에 나는 그대로 가라앉았다. 엄마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것. 내 눈앞에서 엄마의 마지막 숨이 끊어진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다. 엄마는 어땠을까. 그날 시골 촌구석에서의 장례식은 마당 가득 사람들이 상에 둘러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송아지 구경하느라 바빴던 기억뿐이다. 엄마가 울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 엄마도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울었어?"

"그럼. 많이 울었지. 엄마는 지금도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네 할머니 생각도 많이 나고. 못 해준 것만 생각나. 짠하고, 죄송하고."


나는 나의 엄마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까.

마음의 준비를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일까.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과연 되는 일일까.

엄마의 부재를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결정적 한 마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