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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Jan 20. 2021

복직과 퇴직 사이

말해 버렸다. 인사팀에 퇴사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고 말았다. 아직 복직 전이고, 복직해서도 퇴직금이나 이런저런 문제를 지켜보고 해결하려면 최소 6개월의 시간이 필요한데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메일로 물어봐 버렸다.


"아이고, 이 순진한 사람아! 그걸 메일로 직접 물어보면 어떻게 해! 복직해서 분위기 보고 넌지시 떠봐야지! 그렇게 간 보면 권고사직도 안 된다고!"


친한 부장님은 인사팀에 퇴직 의사를 내비쳤다는 내 얘기를 듣고는 펄쩍 뛰었다. 맞는 말이다.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은 '사업부는 문 닫을 예정이지만 직원들은 다른 부서에 재배치'하겠다는 것이니만큼, 내가 먼저 퇴직 얘기를 꺼낸 것은 나중에 협상의 위치에 섰을 때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복직할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궁금한 것만 잔뜩 품고 있기에는 당장 오늘이 좀 쑤셨다.


인사팀에서 온 메일은 딱 예상했던 대로였다. '희망퇴직을 신청받기에는 내 나이나 직급이 해당되지 않고, 사업부가 정리되는 대로 다른 부서 재배치 예정이니 권고사직이나 그와 유사한 절차에 관한 혜택(?)은 없다. 복직 후 계속 근무할 예정이라면 내년 상반기 중으로 재배치할 것이므로 현재로써는 논의된 바가 없다.'가 주요 골자였다. 그러니까, '퇴직할 거면 그냥 나가고, 있을 거면 조용히 기다려라.'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는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회사에서 나에게 보여준 청사진에는 내가 전공한 분야도 살릴 수 있고 앞으로도 유망해 보이는 일이 분명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계획을 보고 설레었다. '이 좋은 회사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군대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두고 다른 길을 택한 나 스스로가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사하고 보니 내가 두 눈 똑똑히 봤던 청사진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벌려 놓은 일부터 수습하고 나서 얘기해 보자고 했다. 덕분에 나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분야의 업무를 시작했다.


회사가 결정한 일인데 내가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일개 사원이 무슨 힘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들어오기 전에 변경된 계획인데 뭐 어쩌겠나.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운 분야도 배우면 좋지! 이 사업 잘 되면 내 전공 살려서 원래 하기로 했던 일도 해볼 수 있을 거야!' 아, 그때의 나는 순진하기까지 했다. 그 후 수년이 지났고, 사업부는 지금까지의 사업을 모두 철수하고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회사의 결정을 듣고도 출산과 육아로 휴직을 해야 했던 나는 매일이 좌불안석이었다. 내 책상이 부지불식간에 사무실에서 빠지더라도 나중에 짐을 찾거나 하는 번거로운 일 없도록 책상 서랍은 물론 컴퓨터 파일도 대부분 정리해 놓고 나온 터였다. 그럼에도 진짜로 내가 돌아갈 책상이 없을까 봐 늘 불안했다. 분기에 한 번씩은 친했던 회사 사람들에게 넌지시 내 책상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히 복직을 한 달 앞둔 지금도 고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단다.


그러니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일 년 여의 시간을 버티면, 회사에서 시키는 다른 일을 하면 된다. 그게 무슨 일이든, 내 짧은 경력마저 깡그리 엎고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일이든 아니든 회사에서 재배치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순조로운 - 실상은 불안과 체념의 분위기겠지만 - 대세의 흐름을 타고 남아 있으면 안정된 직장과 고정적인 월급이 보장되는 일상이 다시 돌아올 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시궁창이다. 새로운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이나 설렘도 없다. 그저 처절히 불안하고 불만족스럽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고 싶어서 입사한 게 아니야.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고 싶어!'라는, 입사 면접 때나 떠올릴만한 얘기를 자꾸만 굳이 꺼내게 된다. 하긴, 회사에서 하라고 하는 대로 하기 싫으니까 육아휴직 중에도 뭔가를 해보려고 글을 쓰고 나만의 콘텐츠 찾겠다고 매달려 보고 이력서도 새로 써보겠다 기웃거려보고 했던 거겠지.


'새로운 일은 배우면 돼! 혹시 알아? 그게 완전 내 적성일지?'

'이거 하고 싶다고 제대했는데, 이렇게 흘러 흘러 아무 일이나 하게 된다고? 안 되지 안돼. 내 길은 내가 찾아야지!'


답 안 나오는 이 질문들의 꼬리 끝에는 늘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따라붙는다.


남들이 볼 때 번듯한 직장? 그럭저럭 해낼 만하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일? 아니면 다 버리고 새 출발?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어도 내 가슴은 뛰는 일?


나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어제 내가 내린 답은 저거였는데, 오늘 내가 찾은 답은 이거다. 매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지만 매일 질문의 답은 바뀌고 마음은 갈대밭이다.


아아, 미치도록 답답한데 딱 하나, 이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내가 서 있던 길은 끝났다는 것.

아예 다르든지, 비슷해 보이지만 같지 않은 길이 이어질 예정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길에서의 나의 짧은 경력은 막을 내렸다.  자의든 타의든-반 이상은 타의지만- 나는 다시 출발선상에 섰다.

멈춰있을 것인가(또는 버틸 것인가), 달려 나갈 것인가. 내가 선택해야 할 때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금의 나에겐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잊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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