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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Jan 11. 2021

"그런 기사 좀 찾아보지 마."

그럼에도 굳이 찾아 읽어야 하는 이유

정인이가 죽었다. 생후 16개월의 아이. 7개월 때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아이. 나의 막내와 같은 나이의 아이. 작고 여린 아이가 죽었다. 부모의 무자비한 손에. 


입양 전 해맑았던 웃음이 천천히 시들어간 얼굴을 사진으로나마 마주하는 일은 아주 괴로웠다. 이 문장을 써놓고도 정인이의 얼굴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하다. 내장이 터져 복부에 피가 가득 차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양아버지가 데리러 오자 힘없이 안기던 아이의 작은 몸이 잊히지 않는다. 


정인이에 관한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여론은 들끓었다. 관련 기사에는 부모를 욕하거나 정인이를 추모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부모를 벌하자고, 담당 경찰을 파면하자고, 아동학대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라고 국민 청원도 빗발쳤다.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밝히고자 하는 시사 프로그램도 연달아 방송되었고, 정인이의 묘에는 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가 처음 정인이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은 몇 주 전이었다. 양부모에게 학대받아 16개월의 아이가 숨졌으며, 양부모를 입건해 전후 사정을 조사 중이라는 것으로 끝맺음하는 기사였다. 그 기사를 읽은 몇 주 전에는 아들을 훈육 목적으로 가방에 집어넣어 사망케 한 엄마의 기사를 읽었고, 그 비슷한 시기에 어린이집에서 물고문(수 분에 걸쳐 물을 십몇 잔이나 마시게 한 것은 고문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을 당한 아이에 관한 기사와 영상을 봤었다. 그저 '세상이 말세'라며 한탄하기에는 너무 자주 발생하고, '그 전에도 있었는데 언론의 발전으로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마음 아픈 일이다. 


사실 내가 그런 비슷한 류의 기사와 영상, 간혹은 국민청원에 관한 글을 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찟하여 무섭고, 혹여나 내 아이가 그런 일을 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일을 당한 아이나 부모의 심정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져 가슴으로나 머리로나 그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학대에 관한 기사를 읽은 날이면, 혼자서 그런 기분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새벽이 다 되어서야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내가 얼마나 무서운 소식을 들었는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얼마나 가슴이 서늘한지 토해내곤 했다. 


"여보, 오늘 그 기사 봤어? 양부모가 입양한 아이를 정말 심하게 학대해서 결국 죽었어!"

묵묵히 내가 쏟아내는 말들을 듣던 남편이 입을 뗐다.

"그런 기사 좀 찾아보지 마. 읽고 나면 당신 계속 스트레스받잖아."


맞다.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 그런 일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으면 그런 기사, 영상, 청원글 안 보면 된다. 그래서 정말로 한 때는 일부러 아동 학대에 관한 기사나 영상은 일부러 멀리 하기도 했다. 안 읽고 싶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내 아이는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넷 뉴스 메인에 아동 학대에 관한 기사가 걸려도 읽기 않고, SNS나 단톡방에 그런 내용이 공유되어도 클릭하지 않았다. '제목만 봐도 너무 마음 아파요.'라거나 '읽고 나면 괴로워서 눈물이 나요.'라는 식의 변명을 하며 눈 감았다.(다른 사람들은 변명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마다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크기는 다른 것이니까.)


하지만, 과연 그것이 '남의 일'일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일까. 

아니다.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 생각하기도 무섭지만 내가 직접 겪을 수도, 나와 가까운 지인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마음으로라도 용기 내어 한 번 더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 과정에서 머리와 가슴에 남은 잔상 때문에 자꾸만 목구멍이 메이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서늘해지지만 스스로 다독다독 진정시켜 본다.  기사 속 아이들 혹은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비슷한 일을 겪고 있을 아이들의 마음보다는 한결 편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은 아니다. 인터넷 상에 글을 남기거나 댓글을 남기는 것도 아니고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직접 도울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그저 올바른 수사와 판결을 받는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뿐이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에서조차 '나 하나쯤이야'를 외치고 싶지 않다. 

....

뭔가 더 다듬어진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뭐라 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그런 마음이다. 이미 정인이는 차가운 땅에 묻혔지만, 또 다른 '정인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냥 그런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미안하고 안타까운, 그런 마음. 정인이와 같은 나이의 막내를 보며 느끼는 안타깝고 아픈, 그런 마음.


다만 바람이 있다면, 언론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는 여론의 선동을 위해 자극적인 내용까지 일부러 끄집어내진 않았으면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라는 표면상의 이유를 들어 굳이 언론화 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들까지 들추고 인과관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내용을 '아님 말고' 식으로 보도하진 않았으면 한다. 어리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한 16개월 아이의 죽음이 소모적으로 소비되지 않기를. 그런다고 정인이의 삶을 되돌리진 못할 테니. 가벼이 들끓다 차갑게 식지 않기를.

그리고 제발,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란다. 가해자의 사정과 인권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다 하늘로 떠난 어린 생명의 인권과 그 아이가 살았을 생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겨주길. 그러라고 법이 있는 것일 테니. 

 

이번 겨울은 참 춥다. 폭설이라 할 만한 눈바람에 신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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