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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08. 2020

길티 플레져,
개고기 식용금지를 반대한다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양천식당. 그냥 엄청 큰 고깃집인 줄 알았다. 지점장님이 즐겨 찾는 맛집이라며 피식대는 선배들이 왜 그랬는지 입구에서 알았다. 이렇게 얼떨결에 개고기를 먹어보게 될 줄이야. 먹어본 적도 없고 먹고 싶지도 않지만 음식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또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배받이가 정말 부드러워”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신 지점장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수육 한 점을 집어 입으로 넣어봤는데 맛은 다 아는 그 고기 맛인데 기름이 많아서였는지 목구멍에서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한 점을 후다닥 삼킨 뒤 소주를 냅다 들이부었던 기억이 난다. 


음식은 문화다. 내가 먹어본 것, 익숙한 것이 맛있다고 여기고 특정한 맛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먹어본 적이 없는 것, 먹지 않아야 한다고 들어왔던 것들을, 우리는 쉽사리 입에 넣지 못한다. 온갖 오감을 통해 내 마음이 결정해야만 먹을 수 있고, 어디서, 언제, 누구와 왜, 어떻게 먹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화학적인 영역이 아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먹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정치적인 의사 결정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개고기에 대한 모든 논란은 ‘먹을 수 있다’ vs ‘먹을 필요는 없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도축을 제외하고 전부 합법인 현재의 개고기 식용과 판매, 농장에 이르기까지, 영양탕 시장만 1조 4천억에 달하는 이 곳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사회적 연결고리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식용을 반대하는 의견을 말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며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실제 개고기 식용이 법적으로 금지될 경우, 생활이 걸린 업체들의 반발을 무산시키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의해 나가는 사회적 비용이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오늘부터 레드썬, 하고 없어질 수가 없다는 말이다. 농장 문을 못으로 박아 잠근다고 그 안에 개들이 사라지지 않듯이. 해서 좋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차이의 간극은 살벌하게 멀다. 


나는 개고기 식용금지 법안에 대해 냉소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늘 취해왔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며 생각이 자꾸 왔다 갔다 해서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해왔으니 어쩔 수 없다라든가, 돼지랑 소, 닭은 잘도 먹으면서 왜 개는 안된다는 거야, 라며 이죽거리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아닐 것이다. 


같은 동물인데 왜 개는 가축으로 넣지 말자고 하는 것인가? 동물을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동물권’이라는 말은 성립 가능한 말인가? 육식을 반대한다는 말이 성립하는가? 사회가 보호해야 하는 약자 중 개가 최우선인가? 개는 왜 동물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까?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을 내 것으로 이름 붙여서 키운다면 개와 고양이만큼 교감할 수 있을까? 동물을 먹이기 위해서 키우고 팔고 잡고 자르는 사람들은 감정노동을 하는 걸까 아닌 걸까? 누가 진짜 개의 식용을 금지하고 싶어 하고, 도대체 왜 그렇게 까지 원할까? 자연적으로 죽은 동물을 먹는 건 괜찮은가? 그리고 가장 많은 논의가 필요한, 자본주의에 관한 성찰. 필요를 창출해야만 유지/존속할 수 있는 이 자본주의 생태계 안에서 채식으로 육식과 축산업을 개선할 수 있을까? 끝없이 풍부한 토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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