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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08. 2020

시급하고 작은 정의를 위하여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 신민영

죄와 벌.


입에 어쩐지 착 감기는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다. 책 내용은 가물거리지만 어느 날 문득 ‘왜 죄와 벌은 한 쌍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죄를 지은 사람은 피해를 갚거나 속죄를 해야겠지만 왜 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애초에 죄는 무엇이며, 벌은 무슨 의미일까.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재판은 근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고 국가가 대신하여 형벌권을 행사하는 이유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복수가 복수를 낳아 사회적 폭력의 총량이 느는 것을 막는 것이다’. (각 p.126, 242) 


고2 여름방학 때 그 해 수능 모의고사 전국 1등을 한 고3 학생의 경향신문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전공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법대를 가고 싶다고 하길래, 속으로 ‘역시 인문계 1등은 법대지’라며 읽은 그 학생의 희망사항은 판검사 따위가 아니었다. ‘법은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마지노선이고 그래서 그걸 공부해보고 싶다’ 던 고등학생의 어른 같은 대답이 충격이었고 나에게는 법에 대해 처음으로 자리 잡은 개념이 되었다. 인간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도 정해져 있으니, 국민윤리 시간에 배운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 빈 말이 아니었구나 감탄했던 기억. 


결국 세계의 가장자리는 중심으로부터 밀려나고 밀려난, 우리가 이제는 없다고 말하는 ‘계급’의 최하위 인간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일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고 무지한, 인생의 의미 같은 너무 ‘멀고 큰’ 건 가져본 적도 바라본 적도 없을 사람들. 이 사람들이 짓는 죄들은, 과연 얼마나 남을 해치고자 했을까. 살아간다기보다 그저 살아지는 데 급급한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범죄가 나에게도 혹시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런 일들을 벌일 가능성이 높은 자들을 미리 겁내지만 실은 그들은 잃을 게 없을 뿐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안전망인 가족도 없어 국선변호인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있었다기보다 결과적으로 범법자가 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사람’이 되고자 한다. ‘형사소송은 당대 사회가 가장 치열한 마찰음을 내는 곳’이며 ‘국가권력의 궁극과 사회 부적응자 혹은 적으로 낙인찍힌 자들이 맞부딪히는 장소가 바로 형사법정’(p.269)이라고, 그래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 늘 살피고,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가장 이익을 보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을 것이다. 멀고 큰 정의보다 ‘시급하고 작은 정의’를 위해 일하는, 내가 이 글 내내 무력하게 불러대는 ‘그들’이 아닌, 이름과 얼굴을 가진 개인들이, 인생이라는 설국열차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푸쉬맨 같은 존재. 책을 읽는 내내 주호민의 ‘신과 함께’ 저승 편에 나오는 ‘진기한 변호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 친구의 카톡 사진에 한동안 떠 있던 ‘We are each other’s keeper’라는 문구도. 저자의 영혼은 누가 지켜줄 수 있을까 걱정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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