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Jan 08. 2020

철들기 전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톨스토이

남자는 철들면 죽는 거다. 죽어도 철들기 싫고 아이처럼 굴고 싶은 마음 너무나 이해한다. 나도 그 마음이니까. 아마 이반 일리치도 마흔다섯이라는, 산업혁명 시대 영국에서는 평균 수명을 넘겼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교회에서 ‘청년반’에도 들어갈 수 있는 나이에 안타깝게 죽었다. 철이 막 들려던 참에. 


이반 일리치가 아프기 시작한 뒤로 겪는 모든 에피소드는 우디 앨런의 징징대는 목소리가 음성 지원이 되며 이 소설은 블랙코미디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 알맞았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죽음이 너무나 절박했고 소름 끼치게 외로운 밤들을 보내다 죽었는데, 나는 이 자가 말하는 ‘마음의 소리’가 전부 너무 웃겼다. 주인공 본인은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른 채 심각해 죽겠는데 나는 킥킥대며 읽었으니. 


순탄하게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놓치지 안/못한 게 이반 일리치의 죄는 아니다. 큰 기복 없는 가정 형편, 괜찮은 학습 능력, 그리고 눈치로 좋은 학교를 나와 자신의 강점을 발휘해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품위’를 지키고 허영심을 충족하며 살아온 인생,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도록 원해지는 그런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인생들이 펼쳐질지 잘 모르겠지만 학습능력 향상을 강요당한 채 교실에 감금되어 십여 년의 세월을 죽이다, 단 한 번 치른 시험성적으로, 그것도 눈치와 요령을 부려가며 대학을 가려고 발버둥 쳤으니까. 나처럼 십 대 시절 능력은 없으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다 수능을 망친 사람도 즐겁지만 조금은 우울한 대학 시절을 보내고 사회에 나와 보니 부모님들이 왜 그렇게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 바꾼다’며 대학 타령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으니까. 이반 일리치처럼 능력이 되는데 일부러 시험을 못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루하든 말든 어쨌거나 ‘성공했다’ 소리 들을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태생에 대한 고민이 있거나 난데없는 인생의 벼락을 직격탄으로 맞아본 사람이 아니면 실제로 고민하게 되는 테제가 아니다. 인생에 대해 가장 순수하게 진지할 수 있는 십 대 때에 저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부모의 불화라든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가정 형편, 또는 내가 가진 태생적 한계 같은 스스로가 핸디캡이라고 인식할 ‘상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치워버릴 수 없는 내 인생의 고민 아이템을 끝까지 고민하고 넘어서 본 사람은 안다. 부조리와 불공평함이 인생과 세계의 디폴트이지만 어쨌든 난 살아가야 한다는 걸. 내 인생은 내 존재를 스스로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레이스니까. 남들 다 가진 간판이나 권력, 돈 없이 내 깜냥과 배짱과 집요함과 노력으로 얻어내야만 하니까. 


강요된 고전 읽기의 시절이 지나 현재를 누리며 앞으로 뭐가 올지 궁리하는 책만 읽어도 벅찬 판에, 오랜만에 백 년 전 소설을 읽으니 역시 인생 별 거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드는 소설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없는 인생이기에 우리 모두 ‘멈춰서 쉬자니 얼어 죽을 것 같았고, 계속 걷자니 기운이 모두 빠져 버릴 것 같(p.148)’은 각자의 인생을 뚜벅뚜벅 걷고 있지 않은가. 단, 철들지 말고 계속 부름이 올 때까지 걸을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시급하고 작은 정의를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