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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08. 2020

우리 모두 밴스가 되자

[힐빌리의 노래] J.D.밴스

의지. 돈. 시간.


내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고 싶을 때 항상 생각하는 3가지 요소다. 셋 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고, 돈을 추종하며 사는 것은 천박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문제를 많은 부분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니 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된다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는 인간을 경멸한다. 


돈은 근본적으로 수단이되 흐르는 속성이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법이고, 혈관에 혈류가 흘러야 살 수 있듯 우리 생활이 윤택하기 위해서는 ‘인 앤 아웃’이 항상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자본주의의 병폐와 근본적인 문제, 사회적인 이슈로서의 자본주의를 짚는 것은 잠시 제쳐두고 지극히 개인의 문제에서의 돈 문제만 생각하기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임금을 통한 부의 창출이 가장 느리고 점차 그 속도의 갭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 부모와 그 이전 세대로부터 축적된 자본이 없는 사람들이 안정된(정의가 여러 가지겠으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가능한가. 말하자면 내가 돈이 없다는 문제가 내 잘못인가? 태어날 때부터의 가난과 유년시절의 궁핍으로 인한 문제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가? 


저자의 이 소박한 책에서 내가 공감한 것은 저 질문 하나다. 사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범주를 논하자면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도 아니고 학구적으로 읽을 만한 사회과학 서적도 아니다. 다만 한 개인의 절박한 수기이자 살아남은 자의 일기장이다. 문장도 거칠고 참고서적이라기엔 너무나 개인적인 성공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저자가 풀어놓은 이 이야기는 적어도 나에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극심한 반항으로 엄마를 운전대에 머리 박고 울게 했던 열여덟 살의 내가, 어른이 되었고 나도 일정 부분 사회 속에서 몫을 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 것은, 저자가 말하듯 순간적인 변화가 아니다. 길고 긴 내 안의 인지부조화를 다스리며 만들어낸 그 과정을 거치면서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책도 읽고 실패를 통한 반성도 있었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알고 있는 그 극적인 성공담이나 신화들의 루틴대로. 다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문득, 내가 그동안 긁어모은 정보들이 짜잔, 하고 합체되어 내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건 맞는 것 같다. 엄마와 둘이서 한 여행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작년 여름의 어느 날, 불현듯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한 번이라도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해본 적이 있었나?’


부모는 왜 나를 이렇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가 고민하며 떠나려고 발버둥 치느라 정신이 없고, 엄마와 아빠가 했던 모진 말에 상처 받는 데 골몰하는 와중에도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이 나를 버릴 것이라거나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거나 둘 중 하나가 집을 나갈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날, 그 두터운 신뢰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다정한 말을 해주지 않아서, 나를 걱정하기보다 혼낸다고 부모에게 흥칫뿡 했던 내가 뭘 도대체 알고 있었나 싶었다.  


내가 홀로 설 수 없는 걸 아는 시기에 누군가가 나를 버릴 수 있다는 그 불안감을 느껴본 이들은 절대 순도 높은 정서적 안정감을 가질 수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일단 믿음을 가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가져본 적이 없는 그 불안, 그 부재가 내 정서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가꾸어주었는지 갑자기 알게 되었다. 항상 내가 잘할 것이라고 믿어주는 그들이 부담스러워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사실 그것이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 그 성취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작은 성취, 또 작은 성취 하나하나 시작하고 마무리 짓게 하는 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이웃들과 주변 사람들이 왜 주변에 포진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가장 좋은 설명은 본인이 직접 이루고 보여주는 것.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해냈다. 엘러지, 왠지 너무 슬픈 단어지만 무기력하거나 희망이 없지는 않지 않은가.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것은 없다. 우리에겐 시간과 의지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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