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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Feb 01. 2020

읽다만책01:참을 수 없는 불편함

[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지금 막 이 책을 50페이지까지 보고 덮었다. 흐릿하게 불편한 지점들이 스멀스멀 나타나더니 점점 밀도가 더해져서 책장이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책이라면 웬만해서는 끝까지 참고 '싫어도 꾸역꾸역 다 보고 욕하자'는 마음으로 읽는 편인데 밍크고래까지 와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내가 불편감을 느끼는 지점이 판결 주제나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태도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독후감은 보통 다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남기기 위해 쓰기 마련인데, 문득 다 읽을 필요가 없거나 읽지 말아야 할 책에 대해서도 써두고 싶어져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무용한 부모가 없듯이 쓸모없는 책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시간은 한정적이고 읽을 책은 쌓여만 가니까. 무엇보다 이 책을 왜 읽지 않아도 좋을지 내 느낌이 명확해졌고 그 뭉실뭉실한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미련을 남기지 않고 책장을 덮고 책등에 띠지를 다시 두르며 알았다. 나는 판사가 쓴 책을 잘 읽어내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쓰인 단어나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워서만은 아닌 것 같다. 변호사나 검사가 쓴 책들은 수월하게 잘 읽고 또 몇몇 책은 팔아치우지 않고 여전히 내 책장 한 켠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김영란이나 문유석 등 최근 활발하게 저작 활동을 하는 판사들의 책을 단 한번도 감탄하거나 흥미롭게 읽은 적이 없다. 아까워서 끝끝내 읽으려고 며칠씩 붙잡고 있다가 결국 포기하거나 완독하더라도 남는 게 없었다. 항상 읽는 도중 불쑥 불쑥 한숨을 쉬며 재미가 없다고 탄식하곤 했는데, 심지어 한국의 100대 판결같은, 하나하나 다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숨어있을 그 책조차 재미가 없었다. 세계는 이야기의 총체나 집합이고, 이런 류의 사회과학 책들은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인간과 사회와 공존과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왜 당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때는 몰랐다. 그냥 내 인생의 바이오리듬과 뭔가 맞지 않아서, 책과 타이밍이 안맞나보다 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판사가 쓴 책은 재미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원인을 생각해보면, 아마 판사들의 글쓰기 습관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한다. 육하원칙에 맞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그에 맞는 감회나 생각을 덧붙이는 방식을 가장 많이 쓸텐데, 일단 생각만으로도 이미 지루하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뛰어난 단편소설가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스타일링'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란 코딩같은 로직의 배열 순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데만 관심이 있고,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사건과 이야기를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왜 이런 '설명충'같은 글을 쓰는 걸까. 거칠게 말해 이들은 소위 '범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계급의 최상위층에 올라가기까지, 지금의 판사를 배출하는 시스템에 비추어 봤을 때 이들이 한 번이라도 엘리트코스 테크에서 이탈하는 행위를 했을까 의심스럽다. 애초에 순응하는 부류여야만 그 지위에 올라갈 자격이 주어지는 이 한국사회에서, 정답(이라고 간주되는 그것)을 최단기간에 써내는 글쓰기만으로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그들이,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라며 절실하게 누군가에게 행동을, 구원을,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써본 적이 있었을까. 소통과 내 진심이라는 것을,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해본 적이 있었을까. 적어도 내가 읽은 책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글은 재미없을 수도 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지루해도 좋은 글은 읽으면 살이 되고 피가 된다 치고. 실은 모노톤의 글보다 더 나빴던 건 어디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불편했던 '시선'의 문제였다. 위에서 아래를 굽어 살피는, 내려다봄의 시선. 내가 역겨워하는 것 중 하나인 '선민의식'같은 태도. 이것 역시 거칠게 말하자면 판사의 본질적인 효용이나 의미에 대한 내공있는 성찰 대신 '좋은 판사'가 되고 싶어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저자의 욕망이 느껴진다랄까. 양형의 이유를 읽을수록 '나 잘했지?'라는 느낌이어서 어디까지 참고 읽어야 하나, 판사님 빼고 이제 온세상이 다 아는 얘기들을, 별로 유용한 정보도 없고 미래지향적이지도 않은 것 같은 이 칼럼들을 내가 왜 읽고 있어야 하나 마음이 복잡해지는 찰나.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고래를 불법포획해서 식당을 운영했던 식당주인에게 '앞으로는 좋은 일 하고 사세요'에서, 나는 시원하게 무릎을 꿇었다. '불법포획'으로 '사적 이익의 폭리 취득'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지게끔 인도하면 거기서 판사의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피고인의 남은 인생과 미래에 대해서 왜 이래라 저래라 묻지도 않은 조언을 해주는 걸까. 저런 같잖은 말은, '나는 너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응원이나 조언이랍시고 맥락없이 묻지도 않았는데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그 사람은 호의와 선의로 한 좋은 말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냐고 말하겠지만. 


딱 그 말투였다. 가르치려는 말투, 훈계하려는 말투. 로스플레인이라고 해야 하나, 판사니까 내가 설명해줄께, 니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야. 화가 난다. 일단 책을 덮고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해보니 이 책 자체가 불쾌해졌다. 제대로 된 판사라면 '양형 이유'를 제대로 쓰는 것이 본질적으로 당연한 일인데 이 내부문서에 가까운 본인의 글을 이렇게 대중서로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가 도대체 뭘까. 


본인이 직접 쓴 양형 이유를 사건마다 달아놨는데 지루했다. 지극히 인본주의적으로 상식에 가까운, 실은 제대로 된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어려운 법조용어로 조근조근 얘기하는 것이 '양형 이유'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법정 안에서는 너무나 미문에 가까웠을 이 문장들이, 세상에 나오자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민망해졌다. 미안하지만 지루한 것은, 법이 늘 인간 세상만사를 뒤따라와서 마지못해 판단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법으로 세상을 바꾸기도 하(다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양형 이유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법이, 도대체 법 따위가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어왔나. 기만하지 말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법조항은 생겨날 수 없으니까, 뭐든지 세상에 일이 생겨나고 나서야 법이 하나하나 생겨났으니까.


앞으로 좋은 판사들의 글을 읽을 행운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한국 판사들이 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핵노잼이였던 이유를 한가지 덧붙이자면, 차라리 극건조풍의(개인취향이지만) 사건에 대한 날카로운 개인의견(그야말로 너무 진보적이어서 차마 법조인의 타이틀로는 쓸 수 없었던)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창밖 풍경 타령이나 하는 한가로운 개인 소회가 너무 많았다. 판사 자격증은 인생 쓴맛짠맛 다 본 최소 45세 이상에게 발급해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판사들이 쓴 책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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