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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Feb 24. 2020

습지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거의 이십 년 만이다. 첫 문단이 매혹적인 소설을 만난 것은. 마루야마 겐지의 ‘천년 동안에’ 이후로 처음이지 않을까. 취향이 이렇게도 변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싶게, 두 소설의 도입부는 닮았다. 아주 스산하고 쓸쓸한 데다가 이 은밀한 풍광이 눈 앞에 그려진다. 겐지는 방금 커다란 고목에 목을 맨 여자를 그리고, 델리아는 콤콤하고 고소한 썩은 내가 진동할 것 같은, 아무도 없고 앞으로도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부드러운 진흙에 발을 담그는 족족 빠져서 점점 잠기게 될 것만 같은 습지를 그린다. 그렇게 나도 “습지는 늪이 아니”라는 첫 문장부터 소설에 빠져들어 잠겼다.

 

사오 년 전에 뉴올리언스를 가본 적이 있다. 읽자마자 알았다. 여기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봤던 굽이치는 물의 미로, 미시시피 강 어디쯤이다. 물이 흐른다라기보다 큰 S자 모양으로 고여있는 강. 해가 뜨자마자 40도를 넘어가는 열기 때문에 베란다 데크에 맨발로 나갈 수 없는 곳. 모든 것을 푹푹 썩혀버릴 것 같은 더위에, 모든 음식을 튀겨서 먹는 곳. 뜨겁고 늘 끓어오르는, 8월의 홍대 앞처럼 쓰레기와 음악이 흘러넘치는 도시. 톰 소여의 푸르른 모험, 느린 배가 있어야 하는 곳.

 

도시에서 태어나 작든 크든 도시에서만 살아본 나는, 자연을 글로 좋아한다. 마음으로는 인간이 더 ‘자연스러워져야 한다’고 믿지만, 한편 ‘인투 더 와일드’ 같은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야생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지, 또 혼자 생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알고 있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시골에서 지내보면 안다. 도시에서처럼 정갈하게 지내려면 시골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그러나, 늘 욕망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커다란 고목, 불어오는 바람, 늘어진 잎사귀들, 조용히 걷는 새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 찰랑이는 강물은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지.

 

그래서 리즈 위더스푼이 이 책을 극찬해서 유명해졌다고 했을 때, 당연히 그녀가 주연했던 ‘와일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을 너무나 좋아했는데, 그 영화도 의외로 너무 좋았기 때문에. 여자 혼자 배낭 메고 4,800 km 산을 몇 달간 헤맨 얘기를 영화로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의구심이 있었으니까. 로맨스도 없고, 강간 같은 극적인 사건도 없고, 그렇다고 숲에 관한 이야기도 아닌, 그저 홀로 묵묵히 걸어가는 우울한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만든다는 거야. 책은 몰라도. 그러나, 영화는 미치도록 좋았다. 왜 사람들이 한밤중에 산을 찾는지 이해하게 된 영화다. 나도 걸어볼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한 영화다. 뭔가 이 지루해서 미칠 것 같은 평안한 삶에, 오만하게 도전이라고 붙인, 나를 벼랑으로 내몰 이벤트가 필요해서. 우리에겐 극적인 순간들이 더 필요하니까. 살아있다는 느낌이 부족해서. 야생에 혼자 버려진 7살 여자 아이 이야기, ‘와일드’의 소녀버전이랄까, 이 책은 비슷한 매혹이다.

 

 습지와 강, 뗏목, 늪, 낚시, 새들, 자연에 관한 모든 묘사는 전부 몇 번씩 다시 읽어도 또 끓어오르는 강렬한 느낌이 좋았다. 마치 내가 거기 있는 듯이. VR보다 더 생생한 묘사. 그러나 나는 이 문장들을 비망록에 옮겨 쓰지 않았다. 델리아 만의 문체인 줄도 알겠고, 또 내가 죽어도 못쓰는 문장들이고, 또 길기도 긴데 결국 남은 비망록의 메모들을 다시 읽어보니 모두 ‘사람 얘기’다.

 




카야는 생물학의 세계를 샅샅이 뒤지며 어미가 새끼를 떠나는 이유에 답이 될만한 설명을 찾아 헤맸다. P.165


안전하게 몸을 사리고, 갈매기 먹이를 주고, 삶을 살아가며 보관할 수 있는 크기로 감정을 잘게 자르는 데는 도가 텄다. P.189

 

카야는 체이스를 생각해서 웃어주었다. 살면서 해본 적이 없는 일인데도 곁에 누군가를 두기 위해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했다. P.221

 

타인의 기척을 기다리지 않는 건 해방이었다. 그리고 힘이었다. P.226

 

카야는 체이스를 잃었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거절로 점철된 삶이 슬펐다. P.264

 

혼자 외톨이로 사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두려움에 떨며 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P.352

 

카야는 이렇게 수월하게 자신을 받아주는 고양이에게 감동해 눈을 감았다. 갈망으로 점철된 삶에 찾아온 심오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P.358

 



빠져들어 읽다가 어느 순간 빠져나온 부분은, 소녀가-7살부터 부모 없이 혼자 살아온 소녀-가, 글을 배우고 읽게 된 이후 달라진 ‘발화’였다. 아무리 많은 독서도, 아무리 깊은 성찰도, 혼자 십 수년을 살아온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없을 텐데 싶은 지극히 소설적 대화부터 흐름이 깨졌다. 아, 이건 소설이지, 작가가 이랬으면 하고 바라는 인물이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또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문맹을, 또 한편 사회(화)를 이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사회관계망이 전혀 없는 모글리 소녀가 생물학 박사가 감탄하는 책을 출판하고, 게다가 글을 깨친 이후 말하는 문장들은 전형적인 ‘먹물 투’여서 흥이 깨졌다.

 

물론, 이 정도의 플롯이어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좋다. 두 가지 다른 로맨스 역시 지극히 도시적이고, 전형적인 ‘영화화가 가능한 수준’의 플롯이다. 인간의 형체를 한 원숭이끼리 사랑을 할 수는 없으니. 게다가 그녀는 당연히 ‘예쁘다’(혹은 젊다의 다른 말). 또래 여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충분하지 않고, 이런 설정은 모두 2020년의 내 눈에는 낡았지만,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렇다 치자.

 

설정 상의 한계(단점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다)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한 또 하나의 숨은 이야기를 포함해서, 이 소설은 장점이 많은 소설이다. 무엇보다 회색 돌덩이들 사이에서 걷고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잠시라도 푸르름을 호흡할 수 있게 해 주고, 갈증을 축여준다.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고 들었는데 현대판 ‘포카혼타스 스릴러’이지 않을까. 마지막을 좋았다고 쓰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야생의 혼자 자란 어린 여자 주인공의 마음속은 현대에서 바글대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성인 여자인 내가 다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수렴할 것 같다. 나는 순수함을 갈망하지만, 내가 감정을 이입했던 주인공 카야는 그 욕망의 오브제로 오래된 이야기 속에 박제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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