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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디 Mar 24. 2022

기혼자에게 혼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세요?

너무 좋아서 손이 벌벌 떨리더라

어제 남편은 불쑥 제주로 찾아온 대학 선배와 함께 달이 뜨고 달이 지도록 술을 마셨다.


숙취가 심한 남편은 예상대로 다음날인 오늘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시계는 이제 막 1시가 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렸지만 오빠는 여전히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구역질만 내뿜고 있다.


나는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없다는 남편을 침대에 눕힌 다음 그의 지갑을 찾았다. 그리고 생활비 카드를 꺼내 내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나는 지금 혼밥 하러 간다.

 



오늘은 오랜만에 해가 좋다. 벌거벗고 있던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도 봄이 오자 본격적으로 제 개성에 따라 몸치장을 시작했다. 붉고 새하얀 꽃나무와 노랗게 핀 유채꽃은 지금 내 마음을 들뜨다 못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조차 못하게 헷갈리게 만든다. 게다가 혼자라니. 매일 챙기던 이어폰의 부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기분이 좋다.



베트남 식당에 왔다. 나는 소고기 쌀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고 나서 이리저리 시선을 둘러댔다. 혼밥 혹은 2인을 위한 테이블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넓은 공간을 독차지할 심산으로 4인 테이블에 앉았다. 가져다주신 재스민 차를 얼음과 함께 유리컵에 절반 정도 따르고 나의 왼편 위쪽에 두었다. 그리고 피클 종지는 내 앞, 한가운데에 똑바르게 두었다. 동행자가 없으니 그릇의 배치 또한 오직 내가 편한 대로 하면 된다. 한 벌의 수저와 젓가락은 오른편에 가지런히 놓았다. 내가 나를 대접하는 기분으로.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수저와 젓가락의 반대편에 가만히 올려보았다. 감성이 돋는다. 유리컵은 햇빛을 받아 이따금씩 투명한 속을 비추었고, 올려다본 하늘은 맑게 개어있다. 쭉 뻗은 삼나무는 푸르기만 한데 이 모든 풍경은 마치 지금 나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하다.



오늘로서 결혼한 지는 580일째고 혼밥은 딱 두 번째다. 2년 전에 퇴근길에 먹은 고기 국수 그다음이 오늘이다. 사실 그때는 혼밥이 이렇게까지나 황홀한 경험이 될 줄은 몰랐다. 결혼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때는 오빠와 일을 따로 하고 있었기에 하루 중 어느 정도는 서로 떨어져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게를 함께 운영하고 나서부터는 하루 24시간을 남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심지어 취미 운동인 수영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서로 떨어질 순간이 조금도 없다. 얼마 전, 새로 오신 수영 강사가 우리 부부가 일도 같이 하느냐고 물어봤다.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강사가 굉장히 당연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을 같이 하지 따로 하나?


사실 남편과 모든 것을 같이 나누며 산다는 것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히 혼자 있게 된 이상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결혼 전에는 얼마나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겨했으며 필요로 했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매일 내 뒤만 종종 쫓아다니는 꼬리들도 떼어 놓고 나왔으니, 정말 나 너무 홀가분해서 곧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저를 들고 육수가 찰박거리는 쌀국수를 가만히 바라본다. 기름이 둥둥 뜬 것이 참으로 맛있게 보인다. 겹겹이 쌓인 얇게 썬 살코기와 그 밑에 깔려있는 숙주, 드디어 혼밥이 시작됐다.


그때 나는 수저를 든 내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는데, 아마 수전증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 손은 떨고 있었다. 하마터면 인증샷을 잊을 뻔했다. 자랑을 하고 싶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본다. 최고다.


설레는 맘으로 뜨거운 국물을 입에 호로록 들이켠 나는 감탄에 감탄을 연신해댔다. 그것은 기쁨의 맛이었고 해방의 맛이었다. 지난 580일 동안의 결혼 생활이 한 그릇 국수에 간이 되어 녹아들어 있다. 쓴맛, 짠맛, 신맛, 단맛. 간이 딱 좋다. 정확히 내 입맛이다.




나는 원래부터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은 무조건 혼자 했고 카페도 혼자 갔다. 쇼핑도 혼자 하고 영화도 혼자 봤다. 상대방을 신경 쓰고 배려하기란 나에게 여간 많은 노동력을 들이는 일이었다. 외출 후 돌아온 방 안에서 마주하게 될 깊은 회의감과 허전함이 두려워 약속을 취소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고독을 원하는 나, 이런 내밀한 나의 본능은 슬프게도 결혼을 한 후에는 자주 내보이지 못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결혼은 '함께' 할 것임을 약속하는 행위인데,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고독감을 내면 깊은 곳에 숨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하게 잊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혼밥을 하니 말인데.. 나중에 꼭 혼자 여행을 하고 싶다. 결혼 전에 그랬듯이 한 번쯤은 결혼 후에도.




국수가 절반 정도 남아있던 그때 나는 내 강아지 두 마리와 고양이가 집에 잘 있을까 생각했다. 아마 현관문에 웅크리고 나를 기다리겠지. 고양이는 아마 아니겠지만 개들은 확실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침대에서 끙끙대며 잠도 편히 자지 못할 남편도 생각했다. 귀여운 내 남편.


아쉽지만 나의 혼밥은 이제 끝이 난 것 같다. 갑자기 국수가 싱겁게 느껴진다. 책도 재미없다. 국물은 어지간히 식어버렸고 면은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불어버렸다. 그래도 고기는 아까우니 다 먹어야지 생각에 건더기를 소스에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나는 이제야 가스불을 켜고 나온 것을 깨달은 주부 마냥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실제로 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도보로 5분 정도였지만, 이 길이 이렇게도 길었던가, 나에게는 무척이나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찰나의 5분이었다.




집 앞에 도착 시간을 확인했다. 1시 10분에 집을 빠져나왔던 나는 그로부터 42분 뒤인 1시 53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결국 나는 한 시간도 채 온전한 나의 시간을 즐기지 못한 것이다. 나 원참.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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