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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디 Mar 27. 2022

빨래를 개키며 힐링하는 남편


어젯밤 나는 서재 겸 게스트 룸으로 쓰는 내 방에서 가만히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을 읽고 있었다. 개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는 내 발 언저리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30분째 잠에 빠져 있었고 거실에서는 남편이 보고 있는 영화의 대사 소리가 분주히 들려왔다.


요즘 남편은 영화를 한 편 다 보고 나서 잠자리에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을 꼭 한 잔 마셔야 하루가 끝난다며 거의 매일 술을 마시던 그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의 저녁 시간에 술이 사라지고 대신 영화가 함께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술을 멀리하던 남편은 가끔 절제할 줄 아는 자신에 대해 높은 만족감을 드러내곤 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에게는 이 편이 훨씬 마음에 든다. 젠체하는 남편의 모습도 귀엽고 기특하다.   


평소에는 느긋하게 영화를 즐기는 남편이 오늘은 분주한 모습이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가락에, 그의 허리는 꼿꼿이 세워져 있고 두 다리는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남편은 지금 영화를 보며 빨래를 개키고 있다.


언젠가 남편은 내가 빨래를 개킨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이제부터 빨래는 내 담당이니 손도 대지 말라고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때부터 오빠는 때가 되면 오늘처럼 영화를 보며 빨래를 정리한다. 그것도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서랍장 속 단정히 정돈된 빨래를 보고 있자면 살 맛이 난다. 속옷 한 장부터 양말 한 켤레까지 그의 사소한 정성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세심한 남자와 사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물론 가끔 잔소리가 듣기 싫을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심하고 무뚝뚝한 남자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내 남편, 깨끗하게 정리된 옷가지들을 보면 힐링이 된다고 말하는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다. 대형 마트에 가도 휴대폰을 요리조리 뒤지며 최저가를 비교하는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다이소에 가면 두 시간 동안 정신없이 물건을 들여다보는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다. 일주일 뒤 우리의 4주년 기념일이며 그날은 토요일이니 알고 있으라고 당부하는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다. 얼마 전에 영화 테이큰을 봤는데 아무래도 너 혼자 여행은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슬슬 봄도 오는데 집 인테리어를 시작하고 싶다며 새침하게 말하는 남자, 그가 바로 내 남편이다.


남편은 날씨도 따뜻해지니 집을 감성적으로 꾸미고 싶다며 이미 가득한 휴대폰 속 장바구니를 나에게 보여줬다. 나는 평소에도 인터넷 쇼핑은 딱 질색인 사람이라 그냥 오빠 알아서 고르라고 잘라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응, 그럼 다 고르고 보여줄게. 또 아무거나 샀다가 환불하라는 소리 들으니까는~'이라고 말하며 신나서 내 방을 빠져나갔다. 내무부장관 허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야 한다며 가끔 핀잔을 늘어놓는 남편은 그가 말했듯이 대부분의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나와 함께 하려는 사람이다. 거의 대부분 나는 알아서 하라고 대답을 하지만 그래도 한 편으로는 그런 그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느낀다.   




방 안에 있던 나는 갑자기 눕고 싶어 졌다. 책을 읽느라 적잖은 에너지를 소비했는지 배도 고파왔다. 나는 잠시 책을 덮어두고 주방으로 갔다. 며칠간 묵혀 둔 설거지 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쿨하게 무시한다. 괜찮다. 설거지는 남편 담당이다. 냉장고를 열어 보지만 역시나 먹을 만한 게 없다. 물 한잔 가득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야심에 찬 마음으로 이불장에서 손님용 매트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이 매트는 남편이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 미리 사둔 메모리폼 토퍼다. 나는 판판하게 토퍼를 편 후 그 위에 얇은 요를 한 장 더 깔고 베개를 가운데 두었다. 이왕 쉬는 거 제대로 쉬자 해서 이불도 꺼냈다. 방바닥은 보일러가 노곤하게 데워준 탓에 기분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이불이 필요할 것 같았다. 요 며칠간 강풍 때문에 혼비백산을 겪은 제주는 아직은 두터운 이불이 필요한 쌀쌀한 날씨다. 꽃샘추위가 제일 추운 법이다.


나는 매트 한가운데 철퍼덕 몸을 뉘었다. 그리고 양팔과 양다리를 마음대로 뻗고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이 기분은 마치 혼자 간 여행에서 킹 사이즈 침대를 혼자 쓰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오른쪽으로 데구루루 굴러 개 두마 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과 눈높이가 같아졌다. 멍한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던 녀석들은 금세 매트 위로 올라와 빈 공간을 채웠다. 고양이는 왼쪽에 아직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눈도 뜨지 않고 있다. 녀석을 깨울 심보로 몸을 반대로 굴려 가까이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깬 고양이는 에옹하고 울며 집사를 나무란다. 우리 집 고양이는 말이 많다. 다시 매트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그렇게 잠시 동안 누워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갔다. 남편에게 제안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 오늘 하루는 자유 느껴도 되냐'

아직 빨래를 개키고 있는 남편이 눈알만 내 쪽으로 굴린 채 대답한다. '무슨 자유'

참고로 이 빨래는 거의... 한 달치 빨래였다. (함께 일하는 신혼부부 현실이.. 바로 이렇다!)


'오늘 나 혼자 애들이랑 방에서 잔다'

'??? 아 뭔 소리야. 안되지 같이 자야지'


어차피 남편이 싫다고 할 줄 알았기에 나는 그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남편 허벅지에 뛰어들며 헤드락을 걸었다. 에에 소리를 내며, 크큭 히죽대며 저리 가라는 남편. 나는 물러나지 않고 나온 남편의 뱃살을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쿡쿡 찔러 그를 약 올렸다. 크큭. 하여튼 나와 떨어지는 거를 무진장 싫어하는 사람이다.




애정결핍이 있는 우리 집 식구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단단히 똘똘 뭉쳐 붙어있는 수밖에. 우리 집은 동물들도 내 껌 딱지, 사람도 내 껌 딱지다. 아쉽지만 나의 자유는 오늘도 뒷전으로 밀려나는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난 무진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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