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가치

일본 구마모토 여행기 2일차 (2025. 09. 24.)

by 얼음안경

삐삐-- 삐삐--

익숙한 알람이 울렸지만, 몸은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낯선 잠자리에 잠 설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면도구를 챙겨 복도로 나서자, 건물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람의 기척이 하나도 들리지 않아, 마치 이 큰 숙소에 나 혼자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공용공간도, 도미토리룸도 비어 있었다.

어제와 같은 고요함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다.

샤워실에서 찬 물로 얼굴을 적시고 나서 천천히 방으로 돌아왔다.

하루와 하루를 이어주는 고요한 그 경계선에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잠시 생각했다.



숙소 앞 거리

숙소 앞에는 흰 구름이 살짝 얹어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깔끔한 색상의 건물들이 올곧게 서 있었다.

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이 스쳐 지나가고,

직장인은 시계를 힐끗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주부는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건넜다.

구마모토의 아침은 강물처럼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스이젠지 조주엔 정원 입구

센바바시역에서 노면 전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자, 스이젠지 조주엔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 입구 근처에는 작은 상점들이 나란히 서 있었지만,

아직 셔터는 올려지지 않은 채 잠겨 있었다.

둔탁한 발걸음 소리와 불규칙한 리듬으로 숨을 고르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만이 이른 아침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정원 내부의 모습

스이젠지 조주엔은 자연을 섬세하게 다듬어낸 일본식 회유 정원이었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초록빛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신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원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고 있었다.

카페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오후가 되자, 파란 하늘 위로 회색 구름이 서서히 번지며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구마모토 중심가로 돌아와, 미리 봐둔 카페로 향했다.

가게 이름은 Nagasaki Jiro Cafe.

창가에 앉으면 노면 전차가 보이는 곳이다.

건물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니, 작은 창문이 달린 나무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희끗한 직원이 은은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나를 창가 자리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아직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평소면 금방 차는 창가 좌석이 두세 자리 정도 남아 있었다.

고소한 커피 냄새와 달콤한 디저트 냄새가 코 끝을 스쳤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카페 내부의 고풍스러운 장식물과 가구들은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게 했다.

창 밖에서는 노면 전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아이스커피와 푸딩을 주문해 카페 안과 밖의 풍경을 조용히 감상했다.

카페 안에 있었던 방명록과 남긴 기록

아이스커피가 절반쯤 남았을 때, 테이블에 놓여 있던 연두색 공책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한 장 넘겨보니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방명록이었고,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다양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저마다 다른 글씨체로 적힌 글에는 각자의 신념과 마음이 묻어나 있었다.

창밖 풍경을 볼펜으로 휘갈겨 그린 그림에는 흐릿하지만 생생한 풍경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이곳에서의 기억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펜을 들었다.

거창하게 쓰기보다는, 떠오르는 대로 몇 줄 적었다.

마지막에는 일본어로 'ありがとう(감사합니다)'라고 적고, 쿠마몬도 그려 넣었다.

나처럼 구마모토로 홀로 온 '여행자' 혹은 '방랑자'가 이 글을 읽고 잠시나마 동행의 온기를 느끼길 바랐다.

점심 시간 때, 숙소 내부의 모습

아침부터 돌아다녔던 탓인지 몸이 쉽게 피로해졌고, 잠시 숙소에서 쉬었다가 다시 나가기로 했다.

숙소 내부는 아침만큼이나 고요했다.

시곗바늘 가는 소리와 오르골 소리만 작게 들릴 뿐이었다.

카운터에는 아침엔 없었던 쿠마몬 인형이 목재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옆 화이트보드에는 오늘의 날씨와 사장님이 추천하는 카페가 적혀 있었다.

깔끔하고 또박또박하게 적힌 글씨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잠시 방에 들어가 짐을 정리한 뒤, 2층 다목적실로 올라갔다.

여러 편의점을 돌며 사온 푸딩과 빵, 우유를 꺼내 조용한 오후를 천천히 채워나갔다.

저녁 먹기 전, 버스 터미널 안에 있는 쿠마몬 기념품샵에 잠시 들렀다.

가게 안을 들어서자 쿠마몬 캐릭터송이 흘러나왔고, 눈앞에는 수없이 많은 검은색 인형들이 가득했다.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어른들도 꽤 보였다.

그들은 쿠마몬 키링과 인형, 수첩을 집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겉모습은 누구보다 성숙한 어른들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잠시 아이 같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프랜차이즈 스시집에서 먹은 하이볼과 스시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거리의 조명이 하나둘 켜졌고,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구마모토의 밤은 밝음과 활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큰 길가를 따라 걷다가, 방향을 틀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미리 찾아두었던 스시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안에서는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소리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배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나무문을 힘껏 밀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문 앞에 붙은 일본어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어 휴대폰 번역기를 켰다.

'지금은 테이크아웃만 가능합니다'


그때,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여자 직원이 하얀 쓰레기봉투를 든 채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더니,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팔을 크게 벌리며 '이빠이(いっぱい)'라고 말했다.

가게 안 자리가 모두 찼다는 뜻이었다.

테이크 아웃으로 먹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왕이면 식당 안에서 먹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결국 발길을 돌려 근처 쇼핑몰에 있는 프랜차이즈 스시집으로 향했다.

밥을 먹는 내내, 들어가지 못했던 그 스시집 간판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금만 더 일찍 가볼걸,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녁까지 먹고 나니, 더 이상 특별히 가볼 만한 곳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구마모토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거리를 서성이다가, 근처에 있던 타코야끼 가게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란 목재 바가 보였고, 손님 세 명 정도였다.

바텐더는 손으로 앞 좌석을 가리키며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옆자리에는 단발머리의 일본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바텐더와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귀 기울여 들으며, 나도 병맥주를 천천히 홀짝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고, 공허한 마음을 안은 채 다시 아늑하고 조용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안에서는 여전히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2층에 있는 공용 공간으로 올라갔다.

좁은 공간에 있다가 이렇게 넓은 공간을 혼자 사용할 때면 해방감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따 마시며, 내일이면 더 이상 올 수 없을 이 공간을 천천히 둘러봤다.

언제 발매된 건지 알 수 없는 만화책들로 가득한 책장,

쿠마몬 쿠션이 올려진 소파,

여기 와서 한 번도 켜보지 않은 TV와 컴퓨터.

그러다 목재 테이블 위에 놓인 공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공용 공간에서 발견한 게스트북

부드러운 갈색 스웨이드 노트 표지에는 'A GUEST BOOK'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게스트들이 남긴 글을 읽었다.

꽤 오래전부터 기록된 흔적들이었고, 한국어로 적힌 글도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대부분은 일상에서 잠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쓴 글 같았다.

짧은 글들이었지만, 각각의 문체에 담긴 목소리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길에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얼굴을 괜히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졌다.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지금은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지.

내가 남긴 글

한참을 종이를 넘기다, 빈 페이지 앞에서 손이 멈췄다.

그리고 나도 조용히 펜을 들었다.

언젠가 이곳에 올 또 다른 '여행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길 바라면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