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

일본 구마모토 여행기 1일차 (2025. 09. 23.)

by 얼음안경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복잡해지는 시기가 있었다.

사람을 너무 자주 만나고, 늘 누군가와 함께 있다 보니 문득 나 자신이 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혼자 조용한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예전부터 언젠가 가보고 싶던, 번잡하지 않은 일본의 소도시가 떠올랐다.

그 중 내가 선택한 곳은 구마모토였다.

그곳에서 차분히 기록하고, 정처 없이 걸으며 진실된 내 모습과 다시 마주하고 싶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jpg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일본에 마지막으로 갔던 건 4월, 후쿠오카 여행 때였다.

5개월 만에 일본어로 적힌 간판과 표지판을 다시 보니

마치 잊고 있던 옛 동네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소도시라 그런지 고층 건물은 거의 없었고, 곳곳에 밭이 펼쳐져 있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도시와 달리, 이곳에서는 일본 현지인들의 조용한 일상을 느낄 수 있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1.jpg

시내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구마모토의 마스코트 '쿠마몬'이 반겨주었다.

쿠마몬 덕분에 지역 경제가 활기를 되찾았다고 하니,

구마모토 입장에서는 복덩이 같은 존재일 것이다.

난 쿠마몬을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딘가 맹하면서도 귀여운 표정이 미소를 자아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2.jpg 구마모토 노면 전차

시내 구경을 위해 건물 밖으로 나가자, 후끈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9월 말이 다 되어가는데도 일본은 아직 한여름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구마모토의 노면 전차.

차와 별개로 이동하는 기차만 봤는데,

기차와 차들과 나란히 신호를 기다렸다가 함께 출발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4.jpg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3.jpg
구마모토 성과 주변 건물

첫 목적지는 구마모토 성이었다.

입장권을 사려고 하자 소소한 해프닝이 생겼다.

그동안 여행할 때 문제 없던 VISA 카드가 이 기계에서는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직원 분과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결국 실패했고,

근처 ATM을 찾아 15분 거리 백화점 지하까지 걸어가 현금을 뽑았다.

땀을 잔뜩 흘리며 다시 돌아왔을 때, 아까 도와주던 직원분이 반갑게 날 알아보고 도와주었다.

손에 입장권이 쥐어졌을 때는 괜히 뿌듯했다.

예상치 못한 고생 끝에 얻은 티켓이라 그런지, 작은 퀘스트를 해결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성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덥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앞에 있었다.

잠시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올라가 보기로 했다.

설명은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 있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냥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며 걸음을 옮겼다.

얼른 성 정상에 올라 도시를 한눈에 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5.jpg

정상에 도착해 도시를 위에서 바라봤다.

높고 화려한 건물은 거의 없고,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멀리 쿠마몬이 그려진 건물도 눈에 들어왔다.

이곳 사람들에게 쿠마몬이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지역의 얼굴이자 자부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6.jpg

성에서 내려오면, 에도 시대의 거리를 재현한 '사쿠라노바바 조사이엔'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음식점과 상점이 즐비한 공간으로, 여행객들로 활기가 가득했다.

오랜 시간 돌아다닌 탓에 배가 고팠는데, 길가에 퍼지는 음식 냄새가 허기를 더 자극했다.

저녁은 다른 곳에서 먹을 예정이라 간단히 말차 아이스크림 사서 길가 벤치에 앉아 먹었다.

말차 단독으로 먹어도 맛있었지만, 옆에 있는 팥과의 조합도 좋았다.

쌉싸름한 말차와 달콤한 팥의 조합이 입안 가득 어우러졌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7.jpg 숙소 가는 길에 찍은 거리 풍경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7.jpg 숙소 외관 모습

저녁 먹기 전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숙소 이름은 다잉 앤 호스텔 나카시마야.

겉모습은 호스텔이라기보다, 일본의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고,

벨을 누르자 위층에서 "하이--" 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장님이 내려왔다.

그리고 체크인을 도와줬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9.jpg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08.jpg

그 뒤에는 사장님은 숙소를 돌며 이용 방법을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줬다.

가장 먼저, 2박 3일 동안 지낼 1인실부터 보여줬다.

문이 여닫이식이 아니라 옆으로 미는 형태라 신기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정갈하게 정돈된 이부자리와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사장님은 방이 좁아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좁은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세계 같았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5.jpg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0.jpg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1.jpg
주방

안쪽에는 공용주방이 있었는데,

단순한 주방이라기보다 사장님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 있는 공간이었다.

벽에 붙여진 사진들, 선반 위에 놓인 작은 소픔들과 부드러운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지브리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2.jpg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4.jpg

현관문과 카운터가 있는 복도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시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소픔들이 어우러져,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6.jpg

카운터 옆에는 이곳을 방문한 손님들의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일본어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적힌 글귀들을 읽다 보니,

이 작은 공간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조금 더 넓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25.jpg 구마모토 밤 거리 풍경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8.jpg

구마모토의 밤거리는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내가 나왔을 때에도 여전히 전차가 다니고 있었는데,

낮에는 맑은 하늘 아래 활기차게 달리던 전차가, 밤에는 정처 없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19.jpg

거리를 걷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동 전문점 Fukuizumi로 향했다.

가츠동과 소바, 어묵까지 모두 판매하는 곳이라 궁금했다.

무엇보다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라 더욱 기대됐다.

사진으로 미리 봐뒀던 가츠동 소바 세트를 주문하고, 어묵바에서 어묵 몇 개를 골라 자리에 앉았다.


음식은 특별히 맛있기 보단 담백하고 정직한 맛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맛이지만, 현지인들 틈에 섞여 먹는 그 순간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20.jpg

식사를 마치고 거리를 걷다 보니,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한 남자가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곧 어떤 사정으로, 혹은 어떤 열정으로

그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의 움직임을 잠시 바라보며, 조용히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22.jpg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21.jpg

또 어디를 가볼까 하다가, 구마모토의 포장마차 거리인 야타이무라에 들렀다.

평일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고, 사람들의 작은 대화 소리와 음악 소리만 들렸다.


먼저 이곳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사케 자판기로 향했다.

100엔 동전을 넣으면 여러 종류의 사케를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일본 사케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라서, 그냥 아무거나 랜덤으로 선택해 마셔봤다.

역시나 예상대로, 일본 사케 특유의 강한 향과 알코올 맛이 나에게는 잘 맞지 않았지만,

자판기를 경험해봤다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KakaoTalk_20251105_102221088_23.jpg

좀 더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맥주를 주로 파는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프리미엄 생맥주 한 잔과 간단한 국물 요리를 시켜놓고, 천천히 마셨다.


일본에 올 때마다 맥주 맛이 유독 좋게 느껴졌는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혼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맥주는 누군가와 마셔야 비로소 맛이 완성된다고, 그날따라 유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결국 가장 큰 안줏거리구나 싶었다.




마음속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작은 응어리를 품은 채 떠난 여행이었다.

그렇다고 그 응어리를 억지로 풀려고 하진 않았다.

그저 내면의 나를 벗으로 삼아,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이 길을 걸어보자."

"이건 한번 먹어볼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며 하루를 쌓아갔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 시간이 어떤 변화를 남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나와의 거리가, 조금은 더 좁혀졌다는 것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