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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Mar 05. 2024

푸른 용의 설을 빛내는 맥주들

용의 기운이 담긴 맥주로 한해 시작하기

토끼의 눈에 사슴뿔, 몸통은 뱀과 같으며 물고기 비늘이 반짝인다. 털은 사자의 것이며 발은 매처럼 날카롭고 흩날리는 수염은 신비롭다. 아름다운 보석과 청동색 그리고 참새고기를 좋아하고 철, 골풀, 전단나무 잎사귀, 오색 실, 지네를 싫어한다. 특히 뼈를 녹이는 지네의 독은 치명적이다.


81개의 비늘이 몸통을 한 방향으로 덮고 있는데, 목 밑에 있는 비늘을 중심으로 49개의 비늘은 반대 방향으로 되어 있다. 이 단 하나의 비늘을 역린(逆鱗)이라 하며, 유일한 급소다. 이곳을 건드린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 동물은 알에서 태어나 500년이 지나도 하늘로 날지 못하면 이무기가 되어 물속에서 흉측하게 살아간다.


이즈음 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물이 있다. 한 번도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본 사람도 없을 테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동물, 우리말로 ‘미르‘라는 이름을 가진 용이다. 농경사회에서 비를 관장하는 용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가뭄이 들면 용왕굿, 용신제 같은 기우제를 지냈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세종실록 등에 실린 용의 설화는 무려 86편에 달한다.


왕들은 상서로운 용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용안, 용포, 용상처럼 용은 곧 왕을 상징했다. 1447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반포 전, 조선 창건에 기여한 6대의 선조들을 노래한 최초의 한글 책 이름도 ‘용비어천가’였다.


2024년, 푸른 용의 해를 빛나게 할 맥주


2024년 갑진년, 청용의 해가 밝았다. 십간과 십이지 조합인 육십갑자 중 41번째 갑진(甲辰)은 푸른 용을 의미한다. 갑이 푸른 색, 진이 용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청용의 해, 만약 차례 상에 아직도 정종을 놓는다면, 이번 설에는 우리 술을 올려보자. 조상님들도 일본 향이 짙게 배인 정종을 보신다면 혀를 끌끌 차고 있으실 게다.   


맥주를 차례 상에 올리자는 주장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하지만 맥주는 청용의 설날에 특별한 기억을 남길만한 술이다. 풍성한 탄산은 기름진 음식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하며 섬세한 쓴맛은 약과나 한과 같은 전통 디저트를 편하게 즐기게 도와준다.


만약 당신이 맥주를 정말 좋아한다면, 전통을 깨지 않는 선에서 우리 맥주로 조상들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수도 있다. 윷놀이의 흥을 돋워 줄 맥주도 있다. 온 가족이 모인 설에 맥주가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맥주의 효용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디, 용의 상서로움이 맥주를 통해 스며들길.


차례상에 맥주를 올려보자, 농자천하지대본

농자천하지대본 @윤한샘

만약 차례주로 맥주를 올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면, 여기 해답이 있다. 을를 브루어리와 생극양조의 컬라보레이션 맥주, 농자천하지대본은 우리 보리와 쌀로 만든 세종(Saison)이다. 세종은 농주를 기원으로 한 벨기에 스타일 맥주다. 마치 우리가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셨던 것처럼 벨기에에서는 맥주로 노동의 땀을 씻었다.


충북 음성에 있는 생극양조는 직접 재배한 보리로 맥주를 만들고 있는 크래프트 양조장이다. 이천에 있는 을를 브루어리와 의기투합해 우리 땅의 기운이 담긴 맥주를 선보였다. 농자천하지대본은 생극양조가 수확한 흑호를 베이스 몰트로 사용했고, 토종 효모회사 바이오크래프트에서 배양한 효모를 넣었다.


다채로운 과일 향속에 흰 후추 같은 향이 뭉그스레 녹아있다. 깔끔한 바디감과 풍성한 탄산은 기름진 음식이 많은 설음식을 부드럽고 낭창하게 만든다. 전과 산적은 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8.7% 알코올은 차례주로 올려도 부끄럽지 않다. 우리 농산물로 빚은 맥주를 즐기고 계시는 조상님들의 미소가 눈에 선하다. 게다가 을를 브루어리 마스코트가 푸른 색 비늘을 가진 을룡이라 하니, 2024년 설에 이보다 더 좋은 맥주가 있을까?


강력한 용의 기운으로 새해를, 드래곤스 밀크

새해 강력한 용의 기운을 받고 싶은가. 용의 기운이 깃든 우유를 마실 수 있다면 허락하겠는가. 용의 우유는 쉽지 않다. 11%에 육박하는 알코올을 품고 있으며 색은 까맣다. 진한 쓴맛은 혀를 짓누르고 길고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오크 향 뒤에 올라오는 바닐라는 다크 초콜렛과 만나 황홀한 아로마를 전달한다. 강하고 힘차지만 우아하고 부드럽다.


미국 뉴 홀랜드 브루잉의 드래곤스 밀크는 버번위스키 배럴에 숙성된 임페리얼 스타우트(Bourbon barrel aged Imperial stout)다. 버번위스키의 알코올과 향을 자기 것으로 승화한 스타우트는 강건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라벨 속 용은 승천을 준비하듯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 준비를 하고 있다. 드래곤스 밀크 한 모금이면 올 한 해 어려움을 충분히 버티고 헤쳐 나갈 수 있을 듯하다.


이 맥주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 어울린다. 윷놀이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한껏 올려준다. 달짝지근한 약과와 한과는 환상의 짝꿍이다. 청용의 해에 용의 그림이 있는 맥주를 마시며 한해의 희망을 이야기하면 어떨까. 비록 색은 어둡지만 용의 우유는 둘러앉은 사람들의 기운을 밝게 할 것이다.


용의 해를 기념하는 특별한 선물을 찾고 있다면 농자천하지대본과 드래곤스 밀크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신토불이 맥주는 귀하다. 냉장고 속 농자천하지대본의 소장가치는 가격을 뛰어 넘는다. 드래곤스 밀크 상미기한은 일반 맥주보다 길다. 무려 3년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즐길 수 있다. 청용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미국 용이니 이해하고 넘어가자.


우리 조상들은 용의 승천을 묘사하며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십이지 중 하늘을 날고 구름을 부리는 용이 다섯 번째로 도착한 것은 땅에 있는 동물들에 대한 배려 때문 아니었을까. 구름 위에서 열심히 뛰어가는 다른 동물들을 응원하는 용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2024년 푸른 용의 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가운데, 모두의 꿈이 함께 이루어지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본 글은 전기협회저널 2월 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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