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봄봄, 봄이 왔어요. 맥주와 함께
3월, 봄이다. 볼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직 쌀쌀하지만 살을 에는 찬기는 사라졌고 턱 끝가지 여미던 옷도 어느덧 가벼워졌다. 마음이야 두꺼운 구스다운을 벗고 스웨터만 입고 밖을 나서고 싶지만, 기다리자. 아직 이르다.
봄의 문턱은 아직 쌀쌀하다. 그럼에도 초봄을 즐기고 싶다면, 3월 추위를 잊게 해 줄 맥주를 준비하자. 봄 맥주도 있을까? 물론이다. 여름에는 차가운 온도와 탄산을 자랑하는 황금색 라거가, 겨울에는 10%의 알코올에 짙은 색을 가진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어울린다면, 봄에는 복비어(bockbier)가 있다.
복(bock)은 독일어로 ‘강한’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독일 맥주에 ‘복’이 붙으면 알코올이 높다는 의미다. 또 다른 의미도 갖고 있다. 바로 숫염소다. 강한 숫염소, 즉 정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뭔가 통하지 않는가. 그래서 복비어 라벨에서는 자연스럽게 근육질을 자랑하는 숫염소를 볼 수 있다.
독일은 1871년 통일 전까지 수많은 공국과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각 지역에는 개성을 뽐내는 맥주들이 즐비했다. 복비어는 16세기 독일 중부 로울 색소니, 아인베크(Einbeck)라고 불리는 도시의 맥주였다. 아인베크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고 홉 향이 도드라졌다. 6~7% 알코올 덕분에 수출에 용이했고 멋진 홉 향이 가득한 프리미엄 맥주로 명성을 날렸다. 이 맥주를 가장 많이 수입했던 곳이 바로 옆에 있던 바이에른 공국이었다.
지금은 맥주 도시로 유명한 바이에른은 원래 질 낮은 맥주로 악명이 높았다. 맥주에 적합하지 않은 재료를 얼마나 많이 넣었던지, 1514년 바이에른 영주 빌헬름 4세는 ‘맥주순수령’을 통해 보리, 홉, 물만 맥주 재료로 사용하라고 공포했다.
빌헬름 4세의 손자, 빌헬름 5세는 맥주를 사랑했다. 하지만 자국에서 나오는 맥주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아인베크 맥주를 수입해서 마셨다. 당시 바이에른은 사투리가 심한 곳이었다. 영주가 수입한 아인베크 맥주는 지역 방언과 섞여 바이에른에서 복(bock)이 됐다. 베크(beck)라는 발음은 높은 알코올 덕분에 복(bock)이라는 의미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문제는 맥주 수입에 너무 많은 재정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결국 빌헬름 5세는 1589년 호프브로이하우스를 건립해, 자체 맥주의 품질 향상을 도모하기로 결심했다. 맥주 수입에 들어가는 비용을 차라리 좋은 맥주 양조에 투자하겠다는 의지였다. 저 품질 맥주로 악명 높았던 바이에른이 독일을 대표하는 맥주 도시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바이에른 맥주가 성장할수록 복비어는 바이에른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인베크는 점점 자신의 맥주 색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아인베크 맥주보다 바이에른의 복비어를 선호했고 점차 원조는 사라지게 됐다.
1634년 바이에른 뮌헨, 파울라 수도원에서 도펠복(doppelbock)이라는 맥주가 탄생했다. 이 맥주는 수도사들이 사순절 기간 동안 물과 빵을 대신해 먹으려고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맥주가 빵을 대신할 수 있는지 허락이 필요했다. 교황청으로 보내는 맥주는 세상 어떤 맥주보다 좋은 재료와 정성이 들어갔다. 그 때문일까. 놀랍게도 로마 교황청은 사순절 동안 맥주를 마셔도 된다고 결정했고, 이후 맥주에는 액체 빵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언어적 의미로, 도펠(doppel)은 ‘두 배’를 의미한다. 하지만 도펠복(doppelbock)이 복비어보다 두 배 높은 알코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단지 더 강한 도수라는 뜻이다. 복비어가 6~7% 알코올이라면 도펠복은 7~9% 알코올을 품고 있다.
이 맥주는 시장에 나타나자마자 단숨에 뮌헨의 명물로 떠올랐다. 짙은 갈색, 멋들어진 건과일, 섬세하지만 명확한 쓴맛은 당대 어느 맥주보다 훌륭했다. 맥주 이름은 살바로트(salvator), 하나님의 맥주였다.
이후 살바토르를 따라 하는 수많은 맥주들이 줄을 이었다. 이 맥주들의 이름 뒤에는 모두 ‘아토르’(-ator)가 붙었다. 모두 파울라너 살바토르에 대한 헌사였다. 현재 파울라너는 더 이상 수도원 맥주가 아니지만, 여전히 살바토르를 출시하고 있다. 한때 한국에서 판매되었던 이 맥주가 더 이상 수입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독일에서는 초봄, 복비어를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보온한다. 6~8% 정도 알코올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에도 복비어가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움츠렸던 몸과 마음은 맥주를 마시는 순간, 곧바로 풀어진다.
한국에서 마실 수 있는 대표적인 복비어로는 바이헨슈테판 비투스(Weihenstephaner Vitus)가 있다. 비투스는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가진 밀 맥주, 바이젠복(weizenbock)이다.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7.7% 알코올은 쌀쌀한 기온에 살짝 언 몸에 활기를 북돋는다. 불투명한 황금색, 뚜렷한 바나나 향, 혀끝은 맴도는 정향은 어떤 맥주보다 매력적이다.
아잉거 셀레브레이터(Ayinger Celebrator)는 한국에서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도펠복이다. 살바토르가 없는 자리를 훌륭하게 메꾸고 있다. 6.9% 알코올, 짙은 갈색, 뭉근한 건과일에 흑설탕 향이 돋보이는 셀레브레이터는 한잔을 지긋이 즐길 수 있는 훌륭한 라거다. 라벨 속 숫염소가 맥주를 향해 서있는 모습은 이미 마시기도 전에 힘을 불끈 전달한다. 말린 무화과, 건 블루베리, 과일 치즈를 곁들이면 꽃샘추위 따위는 느낄 새도 없다.
‘복’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봄이 시작되는 3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복비어를 꼭 마시기를 기원한다. 복비어와 함께, 무한한 복이 당신에게 깃들기를.
전기협회저널 3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