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맛나는 맥주 찾아 이만리 1
한샘 씨 괜찮아요?
아침을 먹지 않고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있는 나에게 L원장님이 물었다. 평소에 치즈와 라즈베리 잼을 잔뜩 얹은 독일 잡곡빵을 애정 하는 내가 커피만 만지작 거리고 있으니 걱정이 되셨던 거 같다. ‘견딜만해요’라고 했지만 사실 괴로웠다. 전날 밤베르크에서 마신 맥주들이 여전히 머리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어제 밤베르크는 한국인의 날이었다. 비어소믈리에 대회와 독일 맥주 대회 심사위원을 위해 함께 온 L원장님, 한국에서 함께 맥주 공부를 했던 누님 그리고 브루어인 그의 남편과 동료들이 밤베르크에서 조우했다. 따로 독일을 여행하던 중 일정이 겹쳤던 밤베르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세 번째 밤베르크 방문인 나는 마치 우리 동네에서 손님을 맞는 듯 들뜬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슈렝케를라에서 시작한 우리의 조우는 페슬라, 슈페지알까지 밤늦게 이어졌다. 유명한 훈제 맥주집들이 모두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가볍게 마시면서 이 순간을 즐기겠다는 호언은 어느덧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어김없이 숙취에 시달렸다. 스케줄이 없으면 모르련만 오늘은 고제(Gose)를 마시러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날이다. 커피로 속을 달래고 띵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힘겹게 짐을 꾸렸다. 사실 L원장님은 아주 크게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셨다. 의사이자 나와 같이 맥주 말기 환자인 그는 누구보다 숙취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같은 맥주 쟁이들에게 숙취는 그냥 혼자 극복해야 하는 숙명 같은 것, 오늘 저녁 또 다른 맥주인 고제를 만나기 위해 간이 분발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고제는 소금이 들어가 짠맛이 나는 맥주다. 라이프치히 전통 맥주로 알려졌으나 원래 고슬라라는 지역에서 시작된 맥주였다. 고제라는 이름도 고슬라(Goslar)를 흐르는 고제 강에서 유래한다. 고제 강은 하슬라 산맥의 물줄기가 모여 만들어진 강으로 짠기를 갖고 있었다. 이 물로 맥주를 만든 고슬라의 맥주는 자연스럽게 짠맛을 띄었다.
짠맛 나는 맥주, 고제가 160km나 떨어진 라이프치히에 정착하게 된 것은 레오폴드 1세라는 인물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북쪽에 있는 안할트 공국의 후작이었던 그는 고제 매니아였다. 매번 고제를 수입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고 돈이 많이 드는 것을 아깝게 여겼던지, 1738년 자신의 집 근처에 직접 고제 양조장을 세웠다. 그리고 곧 약 50km 정도에 있던 라이프치히에도 남는 물량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 사람들은 이 짠맛 나는 이 맥주를 좋아했다고 한다. 짠맛뿐만 아니라 자연발효로 인한 신맛도 함께 있어 인기를 끌 만한 맥주가 아니었을 텐데.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남녀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가 보다.
19세기까지 라이프치히에는 고제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고젠쉔케(Gosenschenke)라 불리는 수십 개의 바(bar)가 있었다. 고제가 인기를 끌자 양조장도 곳곳에 들어섰다. 그중 요한 고틀립 괴테케가 1824년 설립한 리터구츠는 가장 인기가 높았다. 긴 주둥이와 넓은 몸을 가진 독특한 병에 담겨 판매된 리터구츠 고제는 높은 가격이 형성되며 프리미엄 라인으로 정착했다. 이후 정작 고향인 고슬라에서 명맥이 끊긴 고제는 오히려 라이프치히에서는 힙한 맥주로 꾸준히 사랑받게 된다. 괴테도 가끔씩 고젠쉔케에 들려 이 맥주를 마시곤 했다고 한다.
19세기 말 라거 맥주의 인기에도 굳건했던 라이프치히 고제를 절멸로 이끈 건, 세계대전과 독일 분단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고제 양조장은 물론 양조자들도 사라졌다. 전후 1949년, 리터구츠에서 근무했던 프레드릭 부츨러가 잠시 고제를 부활시켰지만 1966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게다가 독일 분단 후 동독 정부는 맥주 양조장의 국유화를 실시해 소규모 지역 양조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제가 다시 부활한 건, 1985년 로타 고드헌이라는 생물학 교수가 오네 베덴켄(Ohne Bedenken)이라는 고젠쉔케의 흔적을 찾으면서 였다. 우연히 오네 베덴켄을 발견한 그는 고제와 그 문화에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연히 과거 고제 양조장에서 근무했던 사람에게 손으로 쓰인 레시피를 건네받고 1986년 사라졌던 고제를 다시 세상으로 끄집어냈다. 근근이 이어지던 고제의 명맥은 통독이 된 지 10년 만인 1999년 두 사람에 의해 라이프치히 문화로 발돋움한다. 틸로 야니헨이라는 청년은 리터구츠 고제를 복원해 오리지널 고제의 부활을 알렸고, 토마스 슈나이더라는 브루어는 고드헌의 고제를 라이프치거 고제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켰다.
사실 고제는 맥주를 공부하던 나에게 전설 속에나 나오는 맥주였다. 해외 맥주 책을 뒤져봐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있다 한들 고슬라 태생의 소금이 들어간, 짠맛 나는 맥주라는 단순한 정보가 다였다. 라이프치히는 밤베르크에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오리지널 고제를 마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라이프치히로 다가갈수록 난 마치 성배를 찾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고제를 마시러 라이프치히에 간다고 했을 때, 한국과 독일 친구들이 한 첫 번째 말은 ‘조심하라’였다. 신나치와 극우세력, 특히 구 동독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 그리고 밤에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는 협박 아닌 협박이 귀를 강타했다. 그중 결정타는 ‘지붕 색’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지붕 색이 무채색으로 바뀌는데, 이게 여전히 라이프치히에 남아있는 동독의 잔재이기 때문에, 동양인은 타겟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무슨 할렘이야? 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내심 무의식 속 내재해있는 빨간 바이러스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라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불편한 속은 기차 화장실을 다녀오니 평안을 되찾았다. 그제야 아름다운 독일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라이프치히로 갈수록 눈을 가늘게 뜨고 지붕의 색을 자세히 봤지만 글쎄…적어도 서울의 지붕보다는 ‘자본주의적’이었다. 지붕 색으로 이념과 도시를 평가하다니 그렇게 따지면 동사무소 표준 건축설계도로 지어진 한국 시골집들은 독재의 잔재인 것인가? 구 동독, 공산주의, 라이프치히, 지붕 색은 아무리 엮어보려고 해도 난센스에 가까웠다.
호텔은 라이프치히 중앙역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예약을 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될 수 있으면 역에서 가까운 호텔을 잡는다. 무거운 짐을 빨리 내려놓고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다. 짧은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동력이다. 어차피 라이프치히에 온 이유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그렇다면 짐을 빨리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다.
라이프치히는 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었다. 작센 지역의 핵심 도시로 특히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곳이었다. 루터는 이 곳에서 종교 개혁을 외쳤고 괴테는 이 곳에서 파우스트를 썼으며 바흐는 이 곳에 잠들어 있다. 30년 전쟁 당시에는 신교 세력이 구교와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이유로 라이프치히에서 고제보다 우어 크로스티쳐(Ur-Krostitzer)라는 맥주가 더 유명하다. 이 맥주는 30년 전쟁의 분수령이었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스웨덴 왕 아돌프 구스타프와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전투를 하러 가던 아돌프 구스타프 일행은 라이프치히 근처 도시인 크로스티츠의 작은 농가에 들려서 맥주를 얻어마신다. 왕은 맥주 한 잔의 대가로 그가 가지고 있던 반지를 하사하고 신성로마제국과 벌인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 맥주 라벨에 있는 초상이 바로 신교도였던 아돌프 구스타프 왕이다. 그는 이어진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가 하사한 반지는 종적을 감췄지만 맥주는 여전히 이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맥주 환자의 맘을 설레게 하는 건 우어 크로스티쳐가 아닌 고제였다. 우어 크로스티쳐는 전설을 담고 있지만 고제는 그 자체가 전설이었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는 예상과 달리 모던했다. 우중충한 지붕은커녕 구 동독의 이미지도 보이지 않았다. 길은 깨끗했고 건물은 현대적이었다. 중앙역 주위도 프랑크푸르트나 뮌헨보다 더 안전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밤베르크에 있던 나에게 이 곳은 현대로 타임슬립을 한 것과 같았다.
라이프치히 구시가지는 중앙역과 가까웠다. 구시가지는 밤베르크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곳에 가면 쉽게 고제를 마실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과 함께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이내 빗나갔다. 바흐가 잠들어있는 성 토마스 성당과 괴테의 동상이 굽어보는 성 니콜라스 성당은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으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 거리는 깔끔하고 현대적이었다. 사실 건물이나 거리의 분위기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고제였다. 당연히 고제는 라이프치히 맥주이니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흔히 마실 수 있겠지.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이 착각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이프치히 구 시청사를 중심에 있는 맥주집에서 고제를 찾기 쉽지 않았다. 고제는 라이프치히에서 흔히 마실 수 있는 맥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울산의 전통주인 복순도가를 울산시내 술집에서 쉽게 마실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모든 맥주집을 갈 수는 없는 터, 갑자기 한 장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그 지역 맥주를 살 수 있는 곳, 바로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다.
독일의 대도시에는 어김없이 갤러리아 카오프오프(Galeria Kaufhof) 백화점이 있다. 이 곳 지하는 각종 독일 식료품과 술을 팔고 있다. 운이 좋으면 할인된 가격으로 고급 독일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백화점이다. 라이프치히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에는 고제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성 니콜라스 성당 바로 옆에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었다. 짐짓 당황한 L원장님을 안심시키며 나는 옅은 희망과 함께 지하 맥주 코너로 내려갔다.
아…짧은 탄식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고제가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선반을 살피다가 근처 직원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나에게 그게 뭔지 되묻고 있었다.
“고제라는 라이프치히 맥주요. 여기에 그 맥주가 없나요?” “그런 맥주 없습니다.”
드라이한 그녀의 말과 표정은 우리를 진짜 너드(nerd)로 만들었다. 갑자기 나 자신이 맥주 찌질이가 된 느낌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 동양인이 갑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맥주를 물어보다니, 그녀 또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제서야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고제는 라이프치히 전통주였지 대중적인 맥주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쉽게 용서했다. 프로답지 못했다. 지금부터는 진짜 맥주 찌질이가 될 타이밍이다. 오늘은 작전 상 후퇴.
호텔로 돌아가는 중 아이러니하게 눈에 들어온 건, 고젠쉔케도 가스트 호프도 아닌 아이리시 펍이었다. 아마 말은 안 했지만 둘 다 이 도시에 한방 먹은 것에 삐졌던 것 이리라. 허기진 배를 달래며 L원장님과 함께 두툼한 고기가 들어간 버거와 맥주를 주문했다. 우리가 라이프치히에서 첫날 마신, 첫 맥주는 고제도 우어 크로스티쳐도 아닌, 아일랜드에서 수입된 킬케니였다. 독일에서 아일랜드 분위기를 흠뻑 느끼며 내일 펼칠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결론은 본진을 직접 타격하는 것.
우선 라이프치거 고제(Leipziger Gose)의 본진인 바이어리셔 반호프(Bayerischer bahnhof) 고제 브로이를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빠르게 한 잔 하고 지체 없이 고제의 심장인 오네 베덴켄으로 진격한다. 바이어리셔 반호프 고제 브로이는 지하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곳은 라이프치히의 역사적인 장소로 1842년 라이프치히와 바이에른을 연결한 최초의 철도가 놓인 역이었다. 문화유적지에 만들어진 브루펍이니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오네 베덴켄은 도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라이프치히 중앙 역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전철과 도보로 가야 했다. 고젠쉔케, 라이프치히 고제가 부활한 그곳이 바로 우리의 성배가 있는 곳이었다.
오네 베덴켄, ‘주저하지 말고’라는 해석이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고제를 위한 진짜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