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한샘 Nov 12. 2019

겨울, 이 맥주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 : 대영제국에서 만든 황제

세상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던 낙엽들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떨어지면 어둠은 길어진다. 하얀 눈이 반가운 손님으로 찾아오는 겨울은 낭만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냉혹한 동장군은 그 낭만을 비련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몸과 마음에 냉기가 차고 생명이 움츠러드는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다. 겨울의 한파는 우리를 방구석 전기장판에 몸을 맡기는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만 다행히 이런 겨울 무기력증을 극복하게 하는 멋진 친구가 있다. 한여름 갈증을 해소시켜주던 그 친구는 조금더 진지한 얼굴과 든든한 몸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괜찮아. 나와 함께라면 겨울은 두렵지 않을거야”


갈증 해소(Thirsty-quenching)라는 날개를 벗고 윈터 워머(Winter warmer)라는 갑옷을 입은 맥주다. 얼어 죽을 것만 같은 겨울을 버틸 수 있도록 뱃속을 따뜻하게 만드는 맥주를 윈터 워머라고 한다. 이 친구는 전기장판 속을 뒹구르는 게으름이 아닌, 벽난로 앞에서 겨울을 즐기는 여유를 선물할 것이다. 



황제(Emperor)가 되지 못한 대영제국의 왕(King)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17세기 이래 영국은 산업혁명과 식민지정책을 통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또는 대영제국으로 통했다. 하지만 북미와 아시아는 물론 오스트리아까지 전 세계를 휘하에 둔 영국의 왕에게 황제라는 호칭은 주어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황제는 로마제국을 잇는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명칭으로 헨리 8세 때 로마의 국교인 카톨릭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만든 영국은 교황이 인정하는 유럽의 황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로마를 잇는 정교회를 품은 러시아는 달랐다. 러시아 왕은 로마의 첫 황제인 시저의 적통을 이어받아 러시아어로 차르로 불렸다. 당시 러시아는 경제혁명을 통해 발전하는 서유럽과는 달리 여전히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682년 새로운 러시아 황제, 차르에 오른 표트르 대제는 그의 고문인 스코틀랜드 인 패트릭 고든과 스위스 인 프랑수아 르포르를 통해 서유럽의 발전에 대해 듣게 된다. 1690년 1인 왕권 체제를 다진 후 그는 신문물의 경험을 직접 쌓고자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키가 203cm에 달하는 표트르 대제는 런던 템스강에 있는 맥줏집 2층에 세를 들어 살면서 낮에는 런던의 문물을 경험을 하고 밤에는 엄청난 양의 흑맥주, 포터를 마시곤 했다. 그는 스타우트 맥주(Stout beer)와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스타우트(stout)라는 단어는 어두운 색을 뜻하는 것이 아닌, 강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높은 보드카 소비로 인해 심각한 음주문화를 겪고 있던 러시아에게 맥주는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기 위한 멋진 친구였다. 1698년 러시아로 돌아간 표트르 대제는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맥주를 마시는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를 평정한 인물은 1762년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였다. 독일 출신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누구보다 맥주를 사랑했다. 하지만 러시아 맥주에 만족하지 못해 엄청난 양의 맥주를 영국에서 수입해서 마셨으며 러시아 브루어리에 영국인 브루어를 고용하기도 했다. 



러시아 황제를 위한 맥주, 임페리얼 스타우트


이 당시 영국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맥주는 포터(porter)라는 다크 에일이었다. 1721년 당시 런던의 앵커 브루어리는 높은 알코올 도수를 갖고 있는 스타우트 포터(Stout porter)를 생산했고 곧 발칸반도와 러시아 황실로 맥주를 수출하게 된다.


이때 러시아로 수출되던 맥주는 장거리 운송에서 오는 산패를 방지하고 고도수의 술을 좋아하는 러시아의 특징을 반영하여 더욱 높은 알코올과 쓴맛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임페리얼, 즉 황제라는 명칭이 앞에 붙게 되었다. 이후,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높은 알코올 도수와 커피, 다크 초콜렛 아로마가 아름답게 도드라지는 다크 에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 즉 황제 스타우트는 전 세계를 휘하에 둔 대영제국의 왕을 위한 맥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보드카를 좋아하는 러시아 국민들의 음주 습관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이를 통해 러시아 맥주 산업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고 이후 높은 도수의 다크 라거인 발틱 포터(Baltic porter)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

20세기 이후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이후 페일에일(pale ale)과 라거(lager)로 인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낡은 선반에서 사라질 뻔한 이들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미국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이다. 1980년대 야키마 브루잉 앤드 몰팅(Yakima Brewing and Malting Co.)은 과거 임페리얼 스타우트 전통을 재창조한 현대식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만들었다. 


10% 이상의 알코올 도수, 기품있는 커피와 다크 초콜렛, 견과류, 토스트의 풍미 그리고 묵직한 바디감에 높은 쓴맛과 단맛의 밸런스가 우아하게 어우러진 현대의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한 겨울 우리의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멋진 친구이다. 다양한 베럴에서 장기 숙성이 가능하여 바닐라, 오크, 쉐리와 같은 멋진 향이 우리의 감각세포를 지루할 틈이 없이 자극한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한 추천 임페리얼 스타우트


현재 한국 시장에서는 영국 정통 임페리얼 스타우트보다 크래프트 씬에서 만든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가장 추천하는 임페리얼 스타우트로는 녹투스 100(Noctus 100)을 들 수 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리겔(Riegele)이 만든 이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깔끔한 바디와 적당한 쓴맛으로 10% 알코올 도수가 부담스럽지 않은 맥주다. 게다가 7000원 대의 가격은 덤으로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한다. 

녹투스100

두 번째 추천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파운더스(Founders)의 KBS로 무려 12.2%의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다. KBS는 다량의 커피와 초콜렛을 넣은 후, 버번 위스키를 담았던 베럴에 숙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프리미엄 임페리얼 스타우트이다. 멋진 커피와 초콜렛 향은 물론 바닐라, 코코아 그리고 오크향, 묵직한 바디감과 이를 모두 아우르는 좋은 밸런스까지 이 맥주를 칭찬하자면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참고로 KBS는 Kentucky Breakfast Stout의 약자다. 한국방송공사를 맥주 양조장으로 만들지는 말자. 

KBS

마지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플레이 그라운드(Play graoud)에서 만든 ‘흑백’을 추천한다. 헤드 브루어인 김재현 이사가 좋아하는 커피가 첨가된 흑백은 10%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으나 높지 않은 쓴맛과 우아한 커피향이 높은 음용성을 만들어 준다. 묵직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바디감은 대한민국 크래프트 맥주의 높은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흑백

한 겨울 벽난로 앞에서 체온으로 살짝 온도를 높인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한잔 하는 것은 과거 러시아 황제가 부럽지 않은 호사와 같다. 집에 벽난로가 없다고? 어쩌면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아랫목이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즐길 수 있는 더 좋은 장소이지 않을까? 옆에 함께 곁들일 수 있는 초콜렛 몇 조각이 있다면 이 겨울, 아주 사랑스러운 계절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영제국의 맥주 IPA, 크래프트 맥주 혁명을 만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