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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Sep 02. 2022

영국 맥주의 자존심, 런던 프라이드

영국 맥주의 정체성을 마시다.

 Keep Calm and Carry On

1940년 9월 7일 나치는 영국 본토에 대공습을 시작했다. 1941년 5월 21일까지 런던은 무려 71회에 달하는 공중 폭격을 받았다. 런던 블리츠(London blitz)라고 불리는 이 공습으로 사상자는 무려 15여만 명에 달했다. 독일은 민간인들의 터전을 파괴하고 불안과 공포를 야기해 전쟁의 승기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왕실과 처칠은 불안에 떠는 국민들을 향해 ‘침착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영국 국민들은 의연하게 지옥과 같은 나날을 견뎌냈다. 불의에 저항하고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항전의지를 다지며 낙담하지 않고 일상을 영위했던 것이다.


엄청난 공습에도 런던에는 꿋꿋하게 피어나는 꽃이 있었다. ‘런던 프라이드’(London Pride), ‘런던의 자부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꽃은 모진 환경에서도 꽃망울을 터트렸다. 공습 중 런던 페딩턴 역(London Paddington station)에 있던 극작가 노엘 퍼스 코워드(Noël Peirce Coward)는 이 런던 프라이드를 떠올리며 노래를 만들었다. 영국 국민들은 자유와 일상을 상징하는 런던 프라이드와 함께 어려운 시기를 한 마음으로 버텼고, 결국 승승장구하던 독일에게 최초의 좌절을 안기며 전쟁을 승리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영국인들은 여전히 이 시기를 ‘최고의 시간’(The finest hour)으로 부르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테일러 워커의 런던 프라이드 @윤한샘

런던 페딩턴에 있는 ‘테일러 워커’(Taylor Walker) 펍에 앉아 수많은 에일 중, 런던 프라이드를 주문했다. 첫 맥주는 무조건 ‘런던 프라이드‘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계 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지만, 20세기 맥주 대전에서 영국 에일은 독일 라거의 공습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 프라이드는 에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에게 런던 프라이드는 영국 에일의 최후 보루, 라거 제국에 대한 저항군과 같았다.


영국 에일을 밀어낸 라거 블릿츠


원래 20세기 초까지 맥주 세계의 옥새는 영국 페일 에일(English pale ale)이 쥐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맥아를 만드는데 석탄을 사용하면서 맥아의 색은 짙은 고동색에서 호박색, 즉 앰버(Amber) 색으로 바뀌었다. 나무를 열원으로 사용할 때는 할 수 없었던 온도 조절이 석탄으로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맥아의 색이 변함에 따라 맥주의 색도 변했다. 짙은 어두운 색을 뽐냈던 포터(porter)를 누르고 새로운 패권을 거머쥔 아름다운 앰버 색 맥주를 사람들은 페일 에일이라고 불렀다.


18세기 후반, 페일 에일은 영국 맥주의 대세가 된다.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맥주에서 ‘색’이라는 가치를 즐기기 시작했다. 더불어 섬세한 과일 에스테르와 건자두 향 그리고 영국 노블홉에서 나오는 꽃향은 가볍고 깔끔한 바디감과 함께 영국 페일 에일의 캐릭터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펍에서 이 맥주를 마시며 정치, 사회, 스포츠를 이야기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바스 페일 에일(Bass pale ale)은 에두와르 마네의 유작 ‘폴리 베르제르 바‘에서 만날 수 있으며, 심지어 1871년 조선말, 콜로라도 호와 협상했던 강화도 관리 김진성 씨 품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강화도 하급관리 김진성. 그의 품에 있는 빨강색 삼각형이 보이는가?

20세기 들어 독일과 미국의 라거가 부상하면서 영국의 에일은 삽시간에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호불호 없는 향미, 청량하고 깔끔한 마우스필(mouthfeel)을 가진 라거는 누구나 좋아했고 대량생산으로 인해 가격마저 가벼웠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국이 된 미국은 아메리칸 라거를 통해 영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털어내려 했다. 버드와이져, 밀러 등은 리바이스, 코카콜라, 맥도널드와 같이 미국 자본주의 문화를 등에 업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현대 맥주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국 에일의 자부심으로 환생한 런던 프라이드


전쟁의 상흔이 아문 1959년, 런던 서부 치스윅(Chiswick)에 있는 풀러스 그리핀 브루어리(Fuller’s Griffin Brewery)는 새로운 페일 에일을 출시한다. 바로 런던 프라이드였다. 영국 맥주 시장을 폭격하는 라거의 공습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일까? 런던 프라이드는 ‘Made of London’(런던산)을 앞세우며 자국 맥주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려 했고 1979년과 1995년, 영국 정통 에일 살리기 운동, CAMRA(Campaign for Real Ale)에서 주최한 영국 맥주 챔피언십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영국을 대표하는 맥주가 된다.

런던 프라이드 @윤한샘
런던 풀러스 에일&파이에서 마신 런던 프라이드 @윤한샘

런던 프라이드를 처음 경험하는 사람은 살짝 생경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붉은 기가 도는 진한 호박색은 강고한 캐릭터를 보여줄 듯하지만 사실 그 반대다. 건자두 혹은 건포도와 같은 과일 에스테르는 매우 가늘고 섬세하다. 옅은 쓴맛과 단맛은 좋은 밸런스를 이뤄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으며 가벼운 바디감은 마치 물과 같다. 알코올 또한 4.7%로 높지 않아 여러 잔 마시기에 부담 없다. 묵직하고 진할 것 같지만 여리고 순하다.


이 맥주에서 라거와 같은 청량감은 기대하지 말 것. 탄산은 약하고 질감은 부드럽다. 아마 강한 탄산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런던 프라이드를 밍밍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라거보다 높은 서빙 온도 또한 이 밍밍함에 한몫 보탠다. 보통 라거는 섭씨 4~7도 정도로 차갑게 나오지만 영국 페일 에일은 섭씨 10~13도로 서빙된다. 낮은 탄산감에 미지근한 온도로 마시는 맥주라니, 여기서 밍밍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밍밍함 혹은 담백함을 즐기는 것이 바로 런던 프라이드의 매력이자 포인트다. 냉면 고수들이 담백함의 정도로 평양냉면의 레벨을 논하듯, 런던 프라이드의 생소한 밍밍함을 극복하면 영국 맥주의 마력에 빠지게 된다.


영국의 정체성을 담은 맥주


한국으로 수입되는 런던 프라이드는 탄산이 들어간 형태로 판매되지만 영국에서는 캐스크 에일(Cask ale)로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리얼 에일(Real ale)이라고도 부르는 캐스크 에일은 펍에서 이차 발효를 하는 영국의 정통 에일을 의미한다. 효모가 만들어내는 약간의 이산화탄소만 있어 플랫한 느낌을 주지만 물처럼 가벼워 마시기 편하다. 알루미늄 캐스크에 담겨 펍으로 이송되며 비어 엔진이라는 수동 펌프를 통해 서빙된다. 이 과정에서 산소가 닿아 쉽게 산화될 수 있기 때문에 캐스크 마스터라고 불리는 전문 관리자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같은 런던 프라이드라도 관리를 잘하는 펍과 그렇지 않은 펍에 따라 맛과 품질이 크게 다를 수 있다. 한국에서도 런던 프라이드를 제대로 이해하는 펍은 낮은 이산화탄소로 거품 없이 서빙한다.

런던 프라이드 @윤한샘

한 때 세계 맥주의 표준이었던 영국 에일. 라거에게 빼앗긴 옥새를 되찾고자 절치부심할 만 하지만 의외로 담담한 듯 보인다. 마치 독일 공습에도 평상심을 유지했던 런던 시민들처럼 영국 에일은 동요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런던 프라이드는 그 중심에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짧은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에일의 정통성을 품고 있는 런던 프라이드에는 영국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노닉 글래스(Nonic glass)에 거품 없이 담긴 런던 프라이드를 마신다는 건, 맥주의 향미를 넘어 문화를 마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맥주에는 ‘벌컥벌컥‘보다 ’한 모금씩’이 더 어울린다. 어디서든 크림슨(Crimson) 색을 입고 있는 런던 프라이드를 마주친다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 보면 어떨까? 이 맥주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영국에 있는 것과 같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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